▲ 김병길 주필

정신대 끌려 갔다온 엄마 때문에
놀림받던 어릴적 동네 친구
‘징용귀신’요시다의 용감한 증언
일제 위안부 실체 폭로
양심적인‘요시다’자취감춘 일본
‘과거사 부정’역주행 광풍 확산

1950년대, 철부지 초등학교 시절 ‘데신따이’라는 말을 처음들었다. 아이들이 동네의 한 친구가 미울때는 “데신따이, 데신따이”라면서 놀리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들은 ‘데신따이’가 무슨 뜻인지는 제대로 모르면서 ‘데신따이’라면서 놀리고 있었다.

나 역시 ‘데신따이’가 뭔지 몰라 집에와서 어른들에게 물어보니 일제때 강제로 끌려간 종군위안부(여자 정신대)라고 했다. 그런데 왜 아이들이 그 친구에게 ‘데신따이’라며 놀렸을까.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친구의 어머니가 일제때 열여덟 나이에 종군위안부로 끌려갔다 왔다는 것이다.

이후 ‘데신따이’는 철이 든 이후 시간이 지나서야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1992년 태평양 전쟁중 정신대 강제 연행자로 악명높은 ‘징용귀신’ 요시다 세이지(吉田淸治)의 증언을 듣고 ‘데신따이’의 실체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당시 78세의 요시다는 아마 죽기 전 죄업을 마지막으로 털어놓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20만명의 부녀자를 노예사냥 하듯이 체포해 전장에 몰아놓고, 패전후에는 사지(死地)에 버려둔 채 철수한 행위가 유대인을 가스실에 집단 학살한 나치스 범죄와 무엇이 다른가”라고 반문했다.

요시다는 1943년 한국인 강제연행 목적으로 일제가 만든 노무보국회 야마구찌현(山口縣)본부 동원부장이었다. 그때 한국인 징용자 5,000명, 종군위안부 1,000명 이상을 직접 연행했다고 털어 놓았다. 그리고 당시 “미야자와(宮澤喜一) 총리가 위안부 문제에 어떤 말로 사죄할지 예의주시하겠다”며 일본 정부는 사죄의 성의표시로 1조엔의 ‘선린복지기금’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요시다는 일본 정부가 정신대 ‘모집’에 ‘관여’했었다는 당시 미야자와 총리의 언급에 대해 “그것은 모집이 아니라 노예사냥보다 더한 체포·구금이었다”고 했다. 또 일본 정부가 위안소 관리에 관여했다는 말에 대해서도 “위안소라면 안락한 매춘시설로 상상되지만 실제로는 마굿간과 창고를 개조한 것이었으며, 매춘이 아니라 집단강간행위였다”면서 분개했다.

그의 증언을 정리하면 일제는 조선인 징용자 200만, 종군 위안부 20만명을 연행했으며 국가권력으로 위안부를 강제연행한 곳은 한국뿐이었다. 그는 서부군사령부의 명령이 있을 때마다 자신이 책임자가 되어 10여명의 징용대를 이끌고 한국에 왔다. 현지 경찰과 군부대에서는 트럭과 20~50명의 지원병력을 동원했다. 경찰이 미리 조사한 자료와 지도로 지원병력이 마을을 포위한 다음 마을 사람들을 모두 넓은 마당에 모아놓고 젋고 건강한 여자만 체포했다니 노예사냥이나 다름 없었다. 또 1943년 무렵에는 미혼 여성들은 거의 다 끌려가고 없어 젊은 주부들을 연행했으며 주로 영·호남과 제주도 지역이었다.

이렇게 붙잡아들인 여자들은 경찰서 유치장과 형무소에 수용했다가 일본으로 끌고가 주로 동남아시아·남태평양 군도의 전쟁터로 보냈다. 일본군은 패전 후 그녀들이 미군포로가 되어 기밀이 탄로 날 것이 두려워 집단 살해하거나 사지에 버려두고 철수했다.

1914년 후쿠오카 현(福岡縣)에서 출생한 요시다는 일본의 괴뢰정권이었던 만주국 관리를 지냈고, 중국 남경(南京)과 한구(漢口)에서 장교대우 군무원으로 일한 경력이 있어 야마구찌현 노무보국회 동원부장으로 발탁되었다. 당시에는 한국인 징용자와 정신대 강제연행이 국가를 위한 일이라는 생각에서 언제나 목표초과에 급급했다고 밝혔다.

나이 60세가 되면서 옛일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요시다는 자신의 범죄행위를 참회하는 수기 집필을 계기로 적극적인 사죄운동을 벌였다. 1983년 발간된 <나의 전쟁범죄>라는 고백록을 출판한 뒤 받은 인세로 1984년 천안(天安) ‘망향의 동산’에 사죄비를 세우기도 했다. 이런 일들이 일본에 알려지자 “왜 지난 일들을 들추어 내느냐”는 일본인들로 부터 수많은 협박전화와 편지를 받았다.

1993년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관방장관은 “일본군 위안소는 당시 군(軍) 당국의 요청에 의해 설치 된 것이며,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 이송에 관해서는 구 일본군이 관여했었다”며 위안부 동원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고노 장관은 일본군위안부들에게 “사과와 반성의 마음을 올린다”고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일왕의 사죄를 요구하고, 중국과 센카쿠 영토분쟁이 심화된 이후 일본사회에서 요시다 같은 양심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마침내는 고노 장관의 사과까지 부정하고 과거사(史)를 반성한 ‘자기 과거사’까지 부정하고 있으니 막가자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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