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거와 김신암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儆順王) 때의 일이다. 천년사직은 이미 기울고 난 후였다. 그는 927년 후백제 견훤의 침공으로 경애왕(景哀王)이 죽은 뒤 왕위에 올랐다.

경애왕은 후백제군이 목전에 다다랐는데도 고려에 구원을 요청해 놓고 포석정에서 환락에 빠져 있다가 최후를 맞았다.

계속된 후백제의 약탈로 국가의 기능이 마비되었고, 영토는 날로 줄어들었다. 민심은 이미 고려로 향했다.
경순왕은 백척간두에 선 나라의 장래를 영축산의 문수대성의 계시를 받아 결정키로 결심하고 태자와 둘째 왕자를 거느리고 하곡현(울산)의 영축산을 찾아 길을 나섰다.

태화사에서 참배하고 길을 가던 중 한 동자승이 나타나더니 “대왕께서 오실 줄 알고 산으로 인도하여 모시고자 왔다”고 고했다.

왕은 다행이라 생각하고 크게 만족하여 길을 따랐다. 그러나 삼호(三湖)앞에서 태화강을 건너자 마자 동자승은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왕은 이 동자승이 문수보살임을 직감하고 “하늘은 이미 나를 버리는 구나”라며 탄식했다.

월성으로 발길을 돌린 경순왕은 고려에 항복하려 했다. 군신들의 찬반이 엇갈렸다. 경순왕은 ‘1천년 사직을 내 줄 수 없다’는 마아태자와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무죄한 백성을 죽게 할 수 없다며 항복하고 만다.

이후 마이태자는 개골산(금강산)에 들어가 바위에 의지하여 집을 짓고 마의(痲衣)와 초식(草食)으로 그 생을 마쳤다.

또 막내아들은 머리를 깎고 화엄종에 들어가 중이 된 이후 문수산 남쪽 산(남암산)에 절을 지어 살았다. 그 절 이름이 김신암이었다고 한다.

이 절 때문에 남암산은 김신기산(金信基山)이라 불렸다. 비운의 경순왕이 삼호를 지나다 크게 탄식한 자리를 ‘헐수정’, 동자가 자취를 감춘 곳을 ‘무거(無去)’라 하여 무거동(無去洞)이라 하는 지명의 기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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