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 양북면 용당리 감은사 3층 석탑 전경. 감은사는 삼국을 통일한 신라 문무왕 때 불사를 시작한 것을 아들인 신문왕이 완공시켰다. 가람은 부왕의 호국 유지를 받들기 위한 신문왕의 절절한 효심이 반영되어 있다.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 지키겠다’
문무왕 호국정신 깃든 사찰

불교에서 탑은 무슨 의미일까? 불교의 태생지인 인도에서 탑은 원래 ‘유골을 매장한 무덤’이었다.

인도를 처음 통일한 아소카왕은 석가모니의 무덤을 발굴 한 후 유골을 통일 왕조 곳곳에 세운 탑에 보존했다.

백성들에게 석가모니의 위대한 생애와 그가 깨우친 진리를 탑이라는 구조물을 통해 보여주고자 했다. 이는 불교적 통치 이념을 세우기 위한 방편이었다.

불교가 전해진 삼국시대 우리나라 곳곳에도 수많은 탑이 세워졌다. 특히 불국토를 염원하던 신라에는 수없이 많은 사찰과 함께 탑이 세워졌다. 초기의 목탑은 대부분 사라졌지만 석탑은 천년의 세월을 버텼다.

경주 감포읍 봉길리의 감은사지 3층 석탑. 수없이 많은 신라의 탑 중 가장 크고 웅장하다. 언제 보아도 힘이 있고 당당하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자신감이 곳곳에 배어 있다. 

 

▲ 감은사지 3층 석탑은 이중 기단으로 제작돼 웅장하고 안정감을 주고 있다. 서탑 기단 모습.

시작은 ‘왜를 진압한다’ 뜻의 진국사
이후 아들 신문왕이 완공 ‘감은사’로
가람터 금당 용혈 통해 부왕 드나들어

이중 기단의 3층 석탑 응회암 재질
나비장 사용 석재 짜맞추기 형식 조립
탑 상부 전체길이 5m 가량 철주 설치

문무왕 수중릉 ‘대왕암’… 황갈색 화강암
만파식적 전설 간직한 정자 ‘이견대’
봉길 앞바다 수중릉 망배위해 지어져

 

◆모든 석탑의 시원이 되는 탑

감은사지 3층 석탑은 울산 도심에서 정자를 거쳐 경주 양남 방면으로 시원하게 뚫린 국도 35호선을 따라 30분 남짓이면 닿을 수 있는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에 있다. 

월성원전을 우회하는 터널길이 끝나는 지점에 있는 봉길리 해수욕장을 지나 경주 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오른쪽에 시선을 압도하는 커다란 쌍 탑이 보인다. 

대종천 변 낮은 구릉에 조성된 이 탑은 통일신라 이후 이 지역에 세워진 모든 석탑의 시원이 되는 탑이다. 

모화 원원사 3층 석탑과 장항리 5층 석탑도 감은사지 석탑의 형식을 빌어 세워진 것이다. 

▲ 금당터에 남아있는 용혈 흔적. 바닷물이 이 용혈까지 올라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감은사는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문무왕의 호국정신이 깃든 사찰이다. 감은사의 시작은 ‘진호국사'를 줄인 말인 ‘진국사'였다. 문무왕은 왜를 진압한다는 뜻 ‘진국사'를 짓다가 완공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 후에 아들 신문왕은 아버지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의 ‘감은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가람은 부왕을 향한 신문왕의 절절한 효심이 반영돼 있다. 가람터 금당 바닥에는 바닷물이 들어올 수 있도록 용혈을 파 두었다. 용이 된 부왕이 이 용혈을 통해 들어 왔다 나갔다 할 수 있게 배려한 것이다. 
가람터 앞, 지금은 연꽃이 심어진 연못은 옛날 선착장이었다고 한다. 지금도 배를 묶어 두기 위한 시설이 남아 있다. 

대종천은 지금은 말라 버렸지만 그리 멀지 않은 옛날에는 이 곳 감은사지에 오르려면 배를 타고 들어 와야 했다고 한다. 신라시대 이 용혈을 통해 바닷물이 금당을 들락거렸을 게 분명해 보인다. 

감은사지 3층 석탑은 다른 석탑과 달리 기단이 이중으로 돼 있다. 이로 인해 상대적으로 탑신이 지상에서 높아져 전체구성에서도 안정감을 주고 있다. 석탑은 일반적인 화강암보다 입자가 약한 응회암으로 이뤄졌다. 주변에서 생산되는 석재를 이용했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사리장엄구를 안치한 곳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석재를 짜 맞추는 형식으로 조립됐다. 돌과 돌 사이를 연결하기 위해 쇠로 만든 나비장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탑 상부에는 전체 길이 5m 가량의 철주가 설치돼 있다. 

지난 1959년과 1992년 서탑과 동탑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신라인들의 빼어난 예술 감각을 확인할 수 있는 사리장엄구가 발견되기도 했다.

▲ 신문왕이 부왕인 문무왕의 수중릉을 망배하기 위해 지었다는 이견대. 이견대 앞 바다 한가운데 있는 돌 무더기가 문무대왕 수증릉이다.

◆호국용 전설이 담긴 대종천

감은사지에서 경주 쪽으로는 쭉 뻗은 도로가 2개 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쓴 유흥준 전 문화재청장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고 했던 좁은 옛길을 밀어내고, 4차선의 시원한 새 도로가 뚫렸다. 이 길을 따라 흐르는 하천이 대종천이다. 

토함산에서 발원한 물길들이 모여 동해로 흘러드는 하천이다. 대종천에도 지명과 관련한 설화가 전한다. 

고려 시대의 일이다. 몽골의 침략으로 경주 황룡사의 구층탑을 비롯한 문화재가 많이 불타버릴 때였다. 황룡사에는 에밀레종(성덕대왕신종)의 네 배가 넘는, 무게 100톤에 가까운 큰 종이 있었는데 몽골군들이 이 종을 탐내어 그들 나라로 가져가기로 했다.

뱃길을 이용하는 것이 당시로서는 가장 효과적인 운반수단이어서 토함산 너머에 있는 하천을 이용했다. 그러나 문무왕의 화신인 호국용은 몽골병사들이 큰 종을 내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배가 대종천에 뜨자 갑자기 폭풍이 일어나 종을 실은 배는 침몰되면서 더불어 종도 바다 밑에 가라앉았다. 이후 큰 종이 지나간 개천이라고 해서 ‘대종천’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 봉길리 해변에서 바라본 문무대왕릉 모습.

◆문무왕 수중릉과 효심 가득한 이견대

감은사지에서 조금만 내려오면 신라 제30대 문무왕의 수중릉인 대왕암이 있다.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겠다고 동해에 묻어 달라 했던 문무왕의 호국정신이 깃든 곳이다. 

해변에서 바다로 200m 들어간 곳에 집채만 한 화강암 바위가 모여 있는 곳이 문무대왕 수중릉이다. 
세계사에 유례없는 황갈색의 수중왕릉은 오랜 세월 거친 물살을 잘도 버티고 있다.

문무대왕은 삼국을 통일한 왕이다. 문무왕은 아버지인 태종 무열왕의 업적을 이어받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삼국을 통일한 후, 우리 영토에 야심을 드러낸 당나라군을 내쫓았다. 하지만 동해로 침입해 백성들을 괴롭히는 왜구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문무왕은 지의법사(智義法師)에게 “나는 세간의 영화를 싫어한지 오래이며 죽은 후에는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지키겠소”라고 말한다. 

문무대왕이 죽은 후 아들 신문왕은 부왕의 유언을 받들어 동해 이곳 봉길 앞바다에 수중릉을 만들었다. 수중릉의 수면 아래에는 길이 3.7m, 폭 2.06m의 남북으로 길게 놓인 넓적한 거북모양의 돌이 덮여 있다고 한다. 

봉길 해변에서 감포 쪽으로 조금만 이동하면 수중릉을 조망할 수 있는 정자가 있는데 이곳이 만파식적의 ‘이견대(利見臺)'다. 

신문왕은 봉길 앞바다에 있는 부왕의 수중릉을 망배(望拜)하기 위해 이견대를 지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옛 건물은 사라졌고, 그 흔적 위에 새로 누각을 짓고 이견대라는 현판을 걸었다. 

이견대는 ‘만파식적(萬波息笛)' 설화를 간직하고 있다. 신문왕이 이견대에 들렀을 때 해룡(海龍)이 나타나 흑옥대(黑玉帶)를 바쳤고, 해룡의 말에 따라 바닷가에 떠 있는 산 위의 대나무를 잘라 피리를 만들어 월성(月城)의 천존고(天尊庫)에 소중히 보관했다. 그 뒤 적군이 쳐들어오거나 병이 났을 때, 또는 큰 가뭄이 들거나 홍수 및 태풍이 불었을 때, 이 대나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낫는 등 모든 일이 평정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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