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재 이언적 선생이 낙향해 머물렀던 독락당의 누각인 계정. 고택 내부 건축 구조물과 연결된 독특한 형식의 누각으로 가옥과 자연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멋스러운 공간을 연출하고 있다. 고택 내부에서 바라본 계정. 

이언적의 숨결 살아 있는
그 곳에…
가을이 깊어간다

경주 안강읍을 찾아가는 길은 어렵지 않다. 경주 시내에서 포항 쪽으로 흐르는 형산강의 서쪽으로 난 4차선 제방도로 포항 쪽 끝 지점이 안강읍이다. 추수를 앞둔 안강의 너른 들녘은 온통 황금색이다. 옥산서원과 독락당은 이곳에서 10분 남짓 걸리는 자옥산 아래에 위치해 있다.

옥산서원
정면 7칸·측면 2칸의 2층 누각 ‘무변루’
구인당 내 추사가 쓴 편액 ‘옥산서원’ 
대청 안쪽 ‘구인당’ 편액은 한석봉 글씨
성리학 거두 회재 저술 등 서적·유품 보존

 

▲ 추사 김정희가 쓴 옥산서원 현판이 걸린 구인당.

◆회재 이언적을 제향하는 옥산서원

큰 도로에서 벗어나 옥산서원으로 들어가는 신작로는 황금빛으로 변한 들판 때문에 가을의 운치를 더하고 있다. 그 길 가운데 쯤 나이 든 소나무 세 그루가 각기 다른 모양으로 여행객을 반긴다. 

신작로가 끝나면 작은 마을이 나오고 좁은 옛길 쪽을 가리키는 ‘옥산서원’이라는 이정표를 만난다. 옛길로 들어서면 마치 원시 숲으로 들어서는 느낌이다. 가지들의 무게조차도 버거운 듯 한 늙은 느티나무·회나무·참나무·벗나무 군락이 길게 이어졌다. 

옥산서원은 지금 보수공사가 한창이다. 이곳 저곳 가설 비개가 설치되었고, 푸른색 장막도 처졌다. 하지만 서원의 정문인 역락문(亦樂門)을 들어서자 옛 선현들의 흔적에 압도되었다. 

옥산서원은 동방오현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는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1491~1553)을 제향하는 서원이다. 조선 중종대의 정치가요 사상가로 성리학의 거두였던 그는 영남 사림을 이끌면서 처음으로 사림파 이데올로기의 이념적 체계화를 이룩한 정통 성리학자였다. 

서원은 그가 죽은 지 20년 뒤인 1572년, 묘우(廟宇)가 건립되었다가 1574년에는 서원으로 승격되면서 선조로부터 ‘옥산서원’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 바깥 지형보다 낮게 만든 안채 마당으로 이어진 독락당 솟을대문.

역락문을 들어서면 무변루(無邊樓)다. 정면 7칸 측면 2칸에 2층으로 이루어진 꽤 규모가 큰 누각건물이다. 아궁이와 굴뚝을 설치하고 온돌방을 들였으며, 양 끝의 1칸씩은 몸채에서 달아 내어 누마루를 돌리고 부섭지붕을 얹은 형태다.

무변루를 통과하여 계단을 올라서면 강당과 동서 양재, 무변루로 둘러싸인 중정(中庭)이 나온다. 그리고 그 앞으로 보이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 강당인 구인당(求仁堂)이다. 

구인당 창방위에는 가운데 두 기둥 사이를 꽉 채우며 걸린 ‘玉山書院’(옥산서원) 편액이 압권이다. 추사의 글씨다.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되기 직전 54세에 쓴 것으로, 기교는 남김없이 떨어져 나가고 굳센 힘만 가득하다.

그래서 ‘철판이라도 뚫을 듯하다’는 평을 듣는 글씨다. 대청 안쪽 ‘求仁堂’(구인당)이란 편액의 글씨는 한석봉의 솜씨다. 사당의 담장 밖 왼쪽에는 회재의 신도비가 있는 비각이 있고 오른쪽에는 책들을 보관하던 경각(經閣)이 있다.

 

옥산서원 앞으로 계곡이 흐른다. 자옥산 골짜기를 흘러내리는 자계(紫溪)의 줄기다. 계곡 너럭바위 중에는 퇴계 이황(李滉·1501~1570)이 쓴 세심대(洗心臺)라는 글씨가 새겨진 곳이 있다. 

물길 옆으로는 반석들이 끊어지며 만들어내는 작은 폭포가 있고, 폭포로 끊긴 계류의 양쪽을 연결하는 외나무다리가 운치를 더한다. 외나무다리 너머 옥산서원은 단풍에 잠기기 직전이다.

옥산서원에는 가장 오래 된 완질본 『삼국사기』(보물 제525호), 우리나라 역대 명필들의 글씨를 석각(石刻)하여 탁본한 『해동명적』(海東名蹟)(보물 제526호), 회재의 친필 저술 5종 13책(보물 제586호)을 비롯한 많은 서적과 회재의 유품들이 보존돼 있다.

 

 

▲ 독락당 곁을 흐르는 자계천 너머에서 바라본 계정.

독락당
보물 제413호·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회재선생 유물관 2,500점 유물 전시
흐르는 계곡 낀 아름다운 정자 ‘계정’

정혜사지 13층 석탑
회재가 친한 승려 만나려 자주 찾은 사찰
국보 제40호로 경주서 보기드문 고층탑
초층탑신 4면 감형·기단 특수한 구조

 

◆산과 물을 벗 삼아 홀로 즐긴 독락당

옥산서원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회재가 중앙 정계에서 밀려 내려와 살던 독락당(獨樂堂)이 있다. 그는 이곳에서 산과 물을 벗 삼아 그야말로 홀로 즐기는 삶을 살았다. 

독락당은 집 자체가 보물 제413호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돼 있다. 또 독락당의 현판은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 선생의 글씨며, 옥산정사의 현판은 이황 선생의 친필이다. 계정에 걸린 편액(액자)은 한석봉 선생이 썼다고 전해 내려온다. 

집 뒤편에는 회재 선생의 유물관이 따로 설치돼 있는데 총 2,500점의 유물이 전시돼 있다. 이 중 퇴계 선생의 글, 인종의 서신을 포함한 135점이 보물로 지정돼 있다.

고택은 사랑채인 독락당 외에도 청지기와 침모 등 측근 노비들이 거처하던 행랑채인 숨방채, 솔거노비들이 거주하며 주인을 뒷바라지하던 공수간, 임금에게 하사받은 글과 서책들을 보관하던 어서각과 사당, 그리고 정자가 들어선 별당 등이 합쳐져 큰 살림집을 이룬다. 

▲ 독락당에서 계곡을 볼 수 있도록 담장을 뚫어놓았다.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다른 고택과 다른 점이 눈에 띈다. 마당이 주변의 지형에 비해 낮고, 이 때문에  고택 전체가 땅을 향해 낮게 깔리는 인상을 준다. 대체로 사대붓집의 사랑채라면 높고 화려하게 꾸며져 집주인의 위엄을 한껏 과시하게 마련인데, 독락당은 그와는 대조적으로  낮게 감추고 있는 것이다.

회재는 독락당에 거처하면서 뒤뜰에 약쑥을 손수 가꾸었다. 회재가 거주하던 독락당 뒷벽의 창은 이 약쑥밭과 이어지는 통로였고, 동쪽의 창문은 계곡을 바라보기 위한 것이었다. 

독락당과 계곡 사이에는 담장이 있어 외부로 향하는 시선을 차단하게끔 되어 있다. 하지만 담장의 한 부분을 뚫고 살창을 설치해 이곳을 통해 계곡의 일부가 눈에 들어오도록 했다. 자연을 향해 열린 구조인 독락당의 대표적인 멋이자 특징이다.

독락당을 오른쪽으로 돌아나가면 담으로 막힌 뒤뜰이 나오고, 그 담에 난 일각문을 밀고 들어가면 독락당의 별당, 계정(溪亭)이 있다. 

원래 여기에는 회재의 아버지가 쓰던 3칸짜리 초옥이 있었으나 회재가 은거하면서 그것을 기와집으로 바꾸고 옆으로 2칸을 달아내어 지금처럼 만든 것이다. 몸채는 방 한 칸과 마루 두 칸을 들이고 계곡을 면하여 쪽마루를 덧대어 계자난간을 두른, 구조가 간단하고 작은 집이다. 난간에 기대어 밖을 보면 정자 아래로 흐르는 물과 너른 바위와 푸른 숲이 무한대의 자연과 이어지고 있다. 

정자의 아름다움이나 멋은 그 건물 자체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림처럼 펼쳐진 주위의 풍광과 어떻게 어울리는지 음미해보아야 그 멋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독락당 동쪽을 흐르는 개울 쪽에서 바라보면 계정의 멋스러움을 한층 더 느낄 수 있다. 정갈한 계곡물과 이제 막 물들기 시작한 단풍 너머로 자리를 잡은 계정은 그야말로 한 폭의 그림이다. 

▲ 독특한 형식의 신라시대의 탑인 정혜사지 13층석탑.

◆신라시대 독특한 양식 정혜사지 13층 석탑 

독락당에서 북쪽 700m쯤 되는 곳에는 신라시대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정혜사 터가 있다. 회재는 독락당에서 글을 읽다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친해 진 정혜사의 승려를 보기 위해 자주 절을 찾았다고 한다.

정혜사지에는 지금 건물은 모두 사라지고 13층 석탑만 외롭게 서있다. 1962년에 국보 제40호로 지정된 정혜사지 13층 석탑은 경주지역에서 보기 드문 층수로 제작 되었을 뿐만 아니라, 2층 이상의 탑신부가 일반적인 체감의 비례를 무시하고 줄어든 점 등이 특이하다. 

그리고 초층탑신 4면에 감형(龕形)을 개설한 것과 아울러 기단부의 축조에 있어서도 일반적인 양식에서 벗어난 특수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이 석탑의 각 부 양식과 조성수법을 검토하여 그 건조연대를 추정해보면, 우선 초층부는 목조탑파(木造塔婆)를 모방한 듯한 예스런 세부(細部)를 지니고 있는 점도 엿보이나, 각 옥개석 하면의 층급받침이 3단으로 약화된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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