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식 전 울산대 교수

19세기 중반 영국을 비롯한 서구열강이 중국을 잠재적 큰 시장으로 보고 밀려 들어왔다. 그리하여 중화사상에 젖은 청조의 요지부동한 폐관(閉關)정책을 무력으로 개항시킨 중/영 전쟁(아편전쟁)은 서구열강의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신호탄이 됐다. 서양을 하찮은 오랑캐로 업신여기며 세계최고의 문명국이라고 자부했던 중국이 서양근대문화를 수용하는 개화파의 양무운동으로 부국강병을 꾀했지만 수구파인 서태후의 견제로 실패한다. 

또한 광서제의 지원 하에 제도적 개혁의 변법자강운동 역시 서태후의 벽을 넘지 못하고 백일개혁으로 끝난다. 이로써 근대화를 거부한 전제왕조인 청조는 신해혁명으로 망하고, 중국의 전제정치가 종식됐다.  

일본 도쿠가와 막부시대의 사쓰마 번주인 ‘시마즈 나리아키라’는 사쓰마 번의 근대화를 이끌면서, 메이지유신의 3걸인 ‘사이고 다카모리’와 ‘오쿠보 도시미치’를 길러냈다.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개화사상에 눈을 뜬 두 사람은 조슈 번의 ‘기도 다카요시’와 함께 봉건적 막부통치를 종식시키고(메이지유신), 천왕중심의 중앙집권과 서구 자본주의 체제의 부강한 근대국가를 수립함으로써, 우리에게 치욕적인 국권을 상실하게 만든 일본 근대사의 영웅이 됐다. 그러나 조선의 흥선대원군은 중국과 일본이 근대화를 추진하는 개화운동이 한창일 때, 쇄국정책으로 봉건적 왕조체제를 고수해 메이지유신으로 군사적, 경제적 강국으로 성장한 일본에 의해 개국당하는 수모를 겪게 된다. 

일본의 무력에 의해 개항한(강화도조약) 고종은 개화선각자인 박규수문하의 김홍집을 2차 일본 수신사 수반으로 임명함으로써 김홍집은 조선 근대화의 역사무대에 첫발을 딛게 된다. 

김홍집이 일본주재 청국 참사관 ‘황준헌’과 국제외교 현안문제를 토의하면서 얻은 조선책략이 고종의 개화의지와 맞물려 개화파가 국정에 적극 참여하는 계기가 됐다. 고종과 김홍집이 이끈 근대화 정책 중 하나인 군제개혁이 임오군란(壬午軍亂)이란 암초에 부딪친다. 

임오군란은 부패한 세도가문인 민씨정권에 대한 누적된 불만, 강화도조약 체결 후 개화정책에 대한 위정척사(衛正斥邪)파 등 보수세력의 반동 및 대원군과 민씨척족 간의 암투와 함께 경제적 수탈을 일삼는 일본에 대한 반감으로 폭발한 것이다.

임오군란을 진압하고자 청군파병 요청을 한 민씨척족은 청국에 의존해 자신의 정권유지를 더욱 공고히 하려 했고, 청국은 외교, 재정 등 내정간섭을 자행하면서 조선의 자주독립성을 훼절(毁折)시켰다. 이로 인해 김옥균, 박영호 등 사대부출신 급진개화파들은,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이룰 갑신정변(1884)을 일으켰으나, 민씨정권의 원병요청을 받은 청군의 공격과 정변 원조자 일본의 배신으로 ‘삼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이는 외세를 끌어들인 근대적 개혁운동이 일반민중과 괴리되고 위로부터 전개된 것이 실패의 원인이 된 것이다. 

위로부터의 개혁인 갑신정변이 실패한 10년 후, 부패한 관리의 가렴주구(苛斂誅求)와 일본의 경제적 침략으로 쌓이고 쌓인 민생고를 분출한 농민봉기가 일어났다(1894). 신분제 제한 철폐, 토지의 균분경작 등 제세안민(濟世安民)이란 목적으로 일반민중, 즉 아래로부터의 개혁의 봉기가 동학농민혁명으로 비화된 것이다. 그러나 밑으로부터 일으킨 내정개혁요구와 왜이(倭夷)를 진멸하겠다는 농민혁명도 물정모르는 고종과 민씨정권이 요청한 청군 파병으로 인해 천진조약에 따라 조선에 군대를 파견한 일본의 무력적인 탄압으로 좌절되고 말았다.   

청국군을 제압한 일본은 친청파 민씨정권을 몰아낸 후, 조선의 식민지화를 촉진하는 전략으로, 개혁추진 주무기관인 군국기무처를 신설하고, 민씨척족의 견제로 한직으로 물러나 있던 김홍집을 영의정 겸 군국기무 회의 총재로 임명함으로써 김홍집의 근대화추진 시대가 열렸다.

김홍집은 조선사회의 폐습으로 누적돼온 과거제도, 신분제도 등 정치, 사회 및 경제제도를 개혁하는 208건의 개혁안을 군국기무처 개설 후 3개월 만에 성안 발표했다. 김홍집의 일차 갑오 개혁안은 갑신정변 및 동학농민군의 내정개혁요강을 반영해 조선을 근대국가체제로 만들려고 한 그의 개혁관이 드러난다. 

이에 일본은 자국이 의도하는 조선근대화개혁을 추진하고자 친일파로 변신한 박영호를 끌어들여 김홍집/박영호 연립내각으로 일본이 조선정치에 직접 관여할 계략이 포함된 홍범14조를 반포하는 등 내정간섭이 더욱 노골화 됐다. 고종과 민씨정권은 껄끄러운 일본을 멀리하고, 조선 진출을 노린 러시아에 관심을 갖고 (이차 갑오개혁을 주도한 박영호와 결별한) 김홍집을 다시 불러 자신을 보좌케 했다.

일본의 대륙침략계획은 청일전쟁 승리로 차지했던 요동반도를 러시아 주도의 ‘3국 간섭’에 굴복해 청에 반환함으로 제동이 걸렸다. 이를 기회로 조선정부는 친러파 우세의 3차 김홍집내각을 결성해 친일세력을 배제하고 독자적인 개혁노선을 지향하려 했다. 조선에서의 세력위축을 겁낸 일본은 러시아의 연결고리인 명성황후 민씨를 시해하는 야만적인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이에 고종은 혼란한 정국을 일신하려고 김홍집에게 간원해 4차 김홍집내각을 발족시킨다. 

을미사변의 비보와 더불어 김홍집내각의 단발령시행은 전국적으로 반일감정을 고조시켰다. 게다가 친러파 이완용(10년 후 을사5적신으로 변신) 등의 공작으로 아관파천(俄館播遷)이란 사태가 발발해 김홍집내각은 붕괴됐고, 김홍집은 정적 친러파의 사주에 의해 친일역적으로 몰려 흥분한 민중에게 격살됐다. 고종이 열강과 세력균형을 위해 조선의 자강을 도모한 개혁운동은 자신의 근대화 파트너인 김홍집을 죽임으로 끝이 났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는 동안 러시아는 경제적 이권침탈에 급급했다. 러시아의 이권획득 야욕을 기화로 구미열강 및 일본은 조선에서의 치열한 이권쟁탈전에 각축함으로써 조선왕조의 붕괴가 촉진됐다. 이를 염려했던 김홍집이 조선사회가 개방체제에 대응할 수 있게끔 시도한 근대화전략은 임금과 백성 모두에게 배척당했고, 결국 조선은 한일합병조약으로 일본의 가혹한 식민통치에 놓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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