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태
前 언론인

‘님아, 그 강물 건너지 마소’ - 公無渡河 공무도하
핸드폰 SNS에서 광화문 광장 집결 소식이 이어졌다. 머리 식히려고 동해남부 해안선을 달릴 때 ‘공무도하가’가 떠올랐다. 만류를 뿌리치고 강 속에 들어가는 백수광부(白首狂夫)가 어른거렸다. 흰 머리 흩날리는 백수광부와 꽃머리 단장한 푸른 집 여사제 이미지가 겹쳤다.

먼 옛날 고조선이 무너졌을 때 통치자이자 제사장인 백수광부는 술병을 들고 강물 속에 들어갔다. 그는 하늘과 백성에게 버림받았다. 그리고 죽음과 세례의 강에 들어갔다.

그로부터 2000년 넘어 또 다른 통치자가 백성에게 버림받고 강가에 섰다. 백만 촛불이 물결처럼 일렁인다. 가슴을 촛농처럼 녹이고, 애간장을 심지처럼 태운 물결이다. 

차를 세워 감은사 앞 동해구(東海口)에 섰다. 푸른 물결이 문무왕 수중릉에 넘실댔다. 왕의 유언이 새겨진 비문을 읽었다. 

‘종묘사직은 한순간도 비워서는 안 되니 태자는 나의 관(棺) 앞에 왕위를 계승하라… 영명한 군주도 마침내 한 봉우리의 흙을 이루고, 머잖아 여우와 토끼가 구멍을 뚫으니 인력만 헛되이 말고 장례를 검약히 하라.’ 

통일대업을 완성하고 투구를 땅에 묻은 왕, 백성을 한없이 아끼고 권세를 내려놓은 왕, 봉분을 쌓지 않고 바다 바위에 뼈를 묻게 한 왕의 뜻이 새겨져 있었다. 

‘그대는 굳이 물을 건너시네’ - 公竟渡河 공경도하
SNS에서 촛불이 켜지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전해질 때 구룡포 방파제에 섰다. 

오징어잡이 떠나는 배를 보니 슬펐다. 집어등(集魚燈)에 몰려들 오징어떼들이 백성 같고, 나도 한 마리 오징어 같았다.

푸른집이 함성의 물결에 둘러싸였다. 여사제는 백만 함성의 강에 빠져들었다. 그녀는 무엇을 짊어지고 물속에 들어가는가. 

정상배에 조작된, 사이비에 놀아난, 선덕(善德) 이후 여권(女權) 지배력을 발휘할 기회를 놓친, 백성의 마음을 할퀴고 내동이친 여사제.

원칙이 반칙이 되고 신념이 아집이 된 허상을 쥐고 허적허적 빠져든 곳은 민심의 강이었다. 

‘물 건너다 빠져 죽으니’ - 墮河而死 타하이사
SNS에는 촛불이 일제히 꺼진 장면이 비춰졌다. 뒤이어 불이 켜졌다. 무수한 반딧불이가 만드는 동조 같았다. 그리고 커다란 촛불의 물결이 검은 바다 야광충처럼 출렁거렸다. 

여사제는 분노의 물결에 빠져 백만 촛불의 만장(輓章) 속에 죽는다. 

그녀는 한 시대를 끌어안고 죽는다. 고대의 죽음처럼 순장해야 한다. 순장조는 가장 친밀했던 비서진, 각료,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그녀를 조작한 당료들, 속았다고 탄식하는 신민들, 주술에 걸린 듯 한쪽으로 쏠려간 외눈박이들.     

백수광부의 죽음에 고조선의 멸망사가 어른거리듯 여사제의 죽음에는 고질적 현대사 있다. 
시대의 온갖 잔재를 끌어안고 죽어야 미래가 있다. 함께 묻혀야 할 것은 승자독식과 패권주의, 비선발호와 권력농단, 민의묵살과 독선독주…. 

죽음에 진정성이 있을 때 새 싹이 돋는다. 여물지 못한 채 떨어진 열매에는 싹이 돋지 않는다.

‘이를 어찌하리오’ - 當奈公何 당내공하
다시 SNS에는 광화문 광장의 북소리가 울리고 촛불소녀들의 군무가 펼쳐졌다. 수많은 깃발들이 푸른집 쪽으로 줄을 이었다.    

구룡포 물결이 거칠게 출렁거렸다. 

이 물결도 가라앉을 것이다. 세상은 정-반-합 또는 발단-반전-정상화의 반복이다. 모든 단계에서 에너지가 소모된다. 천명을 받든 백수광부의 결의, 백성의 고충을 헤아린 문무왕의 용단이 절절히 다가온다.    

구룡포에서 40년간 43톤급 오징어채낚기 배를 몰았다는 60대 선장은 오징어가 많이 잡히지 않는다고 한숨지었다. 그러면서 계절이 바뀌니 새 물이 오고 그러면 어황도 낳아질 거라고 했다. 선장은 밤바다를 향해 배의 시동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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