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성대
자주독립·통일 염원 담긴 신라최고 문화유산
몸통 27단-선덕여왕 신라 27대 즉위 상징
24절기 파악 천문대… 신라 자주국가 선언

선덕여왕릉
백제전투 패배·당나라 모욕 겪고 비극적 죽음
낭산 산정 가리키며 “죽은 후 도리천에 묻어라”
문무왕, 삼국통일 후 왕릉 아래 사천왕사 건립

 

삼국 통일의 기틀을 잡은 선덕여왕은 신라 문화를 절정기로 이끈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사진은 여왕이 죽기 전 ‘도리천에 장사 지내라’고 하면서 지목한 경주 보문 낭산에 위치한 선덕여왕릉.

신라 선덕여왕은 재위기간이 15년 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첨성대와 분황사, 황룡사지 9층 목탑을 세우는 등 신라 문화의 가장 화려한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다.

서기 632년부터 647년까지 신라를 통치한 선덕여왕은 지혜와 영험, 풍모와 인품을 갖춘 왕으로 평가하고 있다.

실제 <삼국사기>는 “선덕여왕은 성품이 관대하며 어질고 총명했다”고 찬사를 보내고 있다. 첨성대와 선덕여왕릉, 사천황사 터에서 그녀의 흔적을 만났다.

◆신라의 자주권을 선언한 첨성대

황룡사지와 분황사를 둘러본 후 어둠이 내린 첨성대를 찾았다. 신라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왕궁(월성)터에 위치한 첨성대는 선덕여왕의 자주독립과 통일을 향한 염원이 고스란히 담긴 신라최고의 문화유산이다. 

첨성대는 초겨울의 모진 바람에도 왕궁 터 너른 들판 한가운데 우뚝 서 있다. 지난 ‘경주지진’때 심하게 흔들려 2cm 정도 틀어졌다고는 하지만 자연재난을 거뜬히 이겨내고 1,400년 전의 그 모습 그대로 고도의 밤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선덕여왕이 자주국가를 염원하며 세운 천문 관측시설인 첨성대.

첨성대는 신라의 유물 중 지금껏 보수, 복원되지 않은 유일한 건축물이다. 첨성대의 내부는 화강암 기단 위부터 27단까지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각각의 돌이 서로 엇갈리도록 쌓아올려졌다. 한꺼번에 무너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1단부터 12단 출입구까지는 자갈과 모래를 채워 넣었고, 출입구부터 꼭대기까지는 공간을 비워 무게중심이 아래로 향하도록 해 외부의 충격을 흡수하면서 하단부와 중심부를 지탱할 수 있도록 했다. 잦은 전쟁과 지진 등 자연재해에도 버틸 수 있도록 한 신라인들의 지혜가 놀라울 따름이다.

기단을 제외한 몸통 부분의 27단은 선덕여왕이 신라 27대로 즉위한 것을 상징한다. 또 기단과 몸통을 합한 28은 별자리 28수(宿)를, 여기에 상층부 정자석 2단을 합한 30은 한 달을 상징한다. 

몸체를 이루는 약 360여 개의 돌은 일 년을, 가운데 난 창문부의 3단을 제외한 하층부와 상층부가 12단으로 나뉘는 것은 12달, 24절기를 상징한다.

조각하지 않은 평범한 석재로 쌓은 선덕여왕릉의 봉분 지지석.

<삼국유사>에 따르면 첨성대는 밤하늘의 별자리와 별의 움직임을 관측해 국가의 길흉을 점치면서 절기를 파악하는 천문대로 사용됐다고 전한다. 선덕여왕이 첨성대를 세운 것은 신라가 독자적으로 하늘의 운행을 관찰하겠다는 의지였다. 

당시 천체의 운행을 관찰하고, 이를 분석, 활용하는 것은 대국 당나라의 몫이었다. 당연히 중국이외의 다른 국가에서 독자적으로 천문을 읽는 일은 허용되지 않았다. 특히 당나라의 힘을 빌려 백제와 고구려와 싸우고 있었던 신라로서는 위험천만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선덕여왕은 당나라의 끊임없는 견제 속에서도 재위 말년에 마침내 첨성대를 완성했다. 그 후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고, 당나라의 간섭을 뿌리치며 자주적인 국가를 이뤘다. 

주인의 이름조차 희미해져 버린 왕릉 표지적.

◆도솔천에 자리 잡은 소박한 선덕여왕릉

선덕여왕의 흔적을 찾기 위한 답사 길은 경주 낭산에 위치한 그녀의 능과 사천왕사지로 이어진다. 낭산은 울산에서 경주시내로 가는 7호국도 변, 경주IC와 보문단지로 이어지는 교차로 직전에 위치해 있다. 낭산의 낭(狼)은 이리를 나타낸다.

낭산은 마치 이리가 웅크린 모습의 야트막한 산이다. 낭산 앞 들판 건너에는 경주 제일의 명산인 ‘남산’이 버티고 있다. 낭산의 숲은 신선이 노닌다고 선유림(仙遊林)이라 불리며 신라 때부터 신성시됐던 산이다.

그래서인지 남산의 삼릉골 못지 않은 아름다운 솔숲이 인상적이다. 하지만 지금은 간벌작업이 한창이다. 주차장에서 왕릉까지 10분 남짓 걸어 오르는 산길 주변 곳곳에 간벌한 소나무 잔해들이 가득하다. 

어수선한 솔밭 길을 지나 산 정상에 오를 즈음 다소곳이 들어앉은 선덕여왕릉을 만난다. 여왕의 능은 의외로 수수하다. 그 흔한 석물도 보이지 않았다. 봉분을 받치고 있는 지지석도 일체의 조각이 없는 평범한 돌로 쌓았다.

신라 문화 융성의 정점을 찍었던 여왕의 능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소박한 느낌이다. 만인의 위에 군림하면서도 인본주의를 잊지 않았던 여왕의 치세와 닮았다. 능 주위 호위무사처럼 늘어선 소나무들은 마치 절을 하듯 길게 가지를 드리우고 있다.

산꼭대기 남쪽을 깎아 조성한 능의 높이는 6.8m, 봉분 둘레는 73m가량이다. 능을 보호하기 위해 쌓은 호석(護石)이 돌출돼 있는 독특한 모습이기도 하다.

여성의 몸으로 최고 통치권자가 된 선덕여왕은 순탄치 않은 길을 걸어야 했다. 신라는 642년 백제와 벌인 대야성 전투에서 패배하게 된다. 이 전투에서 김춘추의 사위였던 품석이 죽는다. 마음이 급해진 선덕여왕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도와줄 것을 요청한다. 하지만, 당나라 왕의 반응은 냉담했다.  

선덕여왕릉 전면에 위치한 제단.

‘여자와는 중요한 정책을 논하거나, 군사적 교류를 할 수 없다’는 태도였다. 심지어 “백제가 신라를 업신여기는 것은 여왕이 통치하는 국가라서 그렇다. 내 친척 중 한 명을 신라로 보내 왕으로 삼고 당나라 군대를 파견하겠다.”는 모욕까지 했다. 전쟁에 내몰린 약소국이 겪어야 할 아픔을 견뎌내야 했다.

선덕여왕의 죽음 역시 비극적이었다. 신뢰했던 비담(毗曇)을 신라 최고의 벼슬인 상대등에 앉혔으나, 비담은 “정치를 형편없이 한다.”는 이유로 반란을 일으켰고, 선덕여왕은 목숨을 잃었다.  

자신의 갑작스런 죽음을 예견이라도 했을까. 선덕여왕은 살아있을 때 자신이 죽으면 도리천에 묻을 것을 명했다. 도리천은 하늘에 있는 산이었기에 신하들은 당황했다. 이에 여왕은 낭산 산정이 도리천이라 알려줬다. 

여왕을 낭산에 장사 지낸 후, 삼국을 통일 한 문무왕이 선덕여왕릉 아래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건립했다. 그때서야 사람들은 선덕여왕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천왕을 모신 사천왕사 위에 도리천이 있으므로, 낭산 꼭대기가 바로 도리천이었던 것이다.

선덕여왕은 천문대 건립을 통해 자주 독립 국가임을 선언하고, 황룡사 9층 목탑을 세워 부처의 힘을 빌어서라도 강대한 통일국가를 이루고 말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또 다른 여왕의 시대를 살고 있는 지금, 무너져 내리고 있는 나라를 무엇으로 바로 세울 수 있을까? 선덕여왕의 총명함과 지혜가 어느 때보다 절실해진다.

문무왕 때 세운 사천왕사 건물의 지주석. 뒤쪽 소나무 숲에 선덕여왕릉이 있다.

문무왕, 당나라 침략 대비 사천왕사 건립

사천왕사지
명랑법사 ‘문두루비법’ 50만 당나라 대군 물리쳐
일제강점기때 절터 가로지르는 철로 놓여 훼손

◆신라인의 평화 열망이 담긴 사천왕사지
 
선덕여왕릉을 되돌아 나오는 길에 사천왕사 터가 있다. 넓은 절터엔 주춧돌 몇 개가 표식처럼 눌러앉아 있을 뿐 황량하기 짝이 없다. 신라 문무왕은 679년 당나라의 침략을 대비해 사천왕사를 지었다.

하지만 절을 다 짓기도 전에 당나라군이 쳐들어 왔다. 급한 김에 풀과 비단으로 절을 감췄다. 명랑법사는 높은 단 위에 올라 밀교의 진언인 ‘문두루비법’을 방위에 따라 베풀었다. 신라인들의 간절한 바람이 받아들여졌을까. 50만의 당나라 대군은 전쟁을 하기도 전에 두 차례나 태풍에 휩쓸려 버렸다. 

이 후 배가 풍랑에 침몰한 까닭이 사천왕사 때문인 걸 안 당나라는 이를 확인하기 위해 사신을 보내왔다. 당나라의 보복을 두려워한 신라인들은 사천왕사를 천으로 가리고 맞은편에 당나라의 덕을 우러른다는 망덕사라는 절을 지었다. 이처럼 사천왕사는 피의 전쟁을 막아내고 나라를 지키려는 신라인의 마음이 담겼다.

하지만 지금 사천왕사 앞으로는 차들이 다니는 국도가 지나가고, 뒤쪽 강당지가 있던 자리는 일제가 철길을 놓아 무참하게도 잘려나갔다. 나라를 수호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지키기 위해 사천왕사를 만든 신라인들의 열망을 되돌릴 방법은 영영 없는 것일까. 다행히 절터와 선덕여왕릉을 가로지르는 동해남부선 철길이 조만간 철거된다고 하니 어떻게 활용되는지 지켜볼 일이다.

곧 끊어질 운명을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한 화물열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남쪽으로 길을 재촉한다. 이 길이 끊어지면 일제강점기 후 갈라졌던 신라의 흔적들은 다시 이어질 것이다. 그날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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