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기분을 나쁘지 않게 하고 모든 것이 편안하게 하기 위해 시류에 따라 돈을 냈다. 1차는 날아갈듯 내고 2차는 이치에 맞아서, 3차는 편하게 살려고 냈다.” 1988년 12월4일 ‘5공화국 비리조사 국회 특별위원회’에 증인으로 출석한 정주영(1915~2001) 당시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답변은 우리 현대사에 회자되고 있다.

일해재단의 598억원 모금을 조사한 이른바 ‘5공 청문회’에서는 모금책이었던 장세동이 “강제모금은 있을 수 없다”며 기업들의 자발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이틀뒤 정주영회장의 폭탄 발언으로 드러난 권력 앞에 약한 대기업이 거액의 돈을 출연한 사연이다. 

28년의 세월이 흘렀다. 당시 청문회에 섰던 삼성, 현대차, SK, LG, 한진, 롯데 총수의 2,3세 경영인 6명이 2016년 12월6일 또 정경유착을 질타하는 청문회에 섰다. 대한민국의 국내총생산(GDP)은 88년 2,023억 달러에서 2015년 1조4,102억 달러로 7배 늘었다. GDP 기준만으로 세계 11위다.

덩치는 커졌지만 한국 경제사에 2016년 12월6일은 다시 치욕의 날이었다. 시곗바늘은 놀랍도록 정확하게 뒤로 돌려졌다. 악역이 전두환 대통령에서 박근혜 대통령으로 바뀌었지만 사유는 같다. 28년 전과 다른 것도 있긴 있다. 그동안 기업 총수들이 개별적으로 국회 국정조사에 나간 일은 있지만 6일처럼 한꺼번에 9명이 증인으로 출석한건 또 처음이다.

박정희, 박근혜 정부는 경제와 관련해 같은 길 위에 달리고 있다. 재벌이 특혜를 토대로 성장하고 그 과실을 정권과 나누는 정경유착의 모델이 이어졌다. 제왕이 영주에게 땅을 나눠주고 영주는 그 땅을 농노에게 빌려줘 소작하도록 하고 소작의 산물을 권력의 크기 순으로 분배하는 봉건시대의 장원경제와 그 구조가 닮았다. 

한강의 기적은 정주영, 이병철의 기업가 정신에다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기득권 보호장치가 맞물려 돌아가면서 수직적 질서를 이룬 결과물이다. 이런 경제적 질서와 ‘질서 있는 퇴진’으로 언급되는 정치적 질서는 28년이 지나 묘하게도 맞물려 돌아간다.

 

저작권자 © 울산매일 - 울산최초, 최고의 조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