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억온천단지 속 포위된 ‘천년고찰’
자장율사 창건… 통일신라 후기 양식
남북으로 50m 떨어진 삼층석탑 2기
몸돌 인왕상·문고리 조각 새겨져
흙속에서 발견된 보물 ‘석조여래좌상’
좌대 화려한 연꽃무늬·사자상 눈길
울주군, 철저한 고증후 간월사 복원키로

울주군 상북면 등억리 온천휴양단지 속에 위치한 간월사는 신라 진덕왕 때 자장율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진은 간월사 3층석탑 남쪽 탑에서 바라본 간월사 터의 모습. 가운데가 금당터이고, 오른쪽 소나무 사이로 북탑이 보인다.

겨울 폐사지를 찾는 묘미는 ‘텅빈 충만’이라고 할 수 있다. 거칠고 삭막한 공간 속에 숨어 있는 과거의 흔적들을 찾아 오늘을 반추해 보면 마음이 충만해지는 것.

불교를 기반으로 했던 신라의 중심권이었던 울산지역에도 신라와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졌던 사찰들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동축사, 망해사, 신흥사 등은 천년의 세월을 버티고 아직도 그 자리에 남아 있고, 간월사, 장천사, 운흥사, 반고사, 영축사, 청송사 등도 절 터와 일부 유물들이 남아 옛 사람들의 흔적을 전하고 있다.

울주군 상북면 등억리 간월산 자락에 위치한 간월사 터는 울산권역에 남아 있는 폐사지 중에선 비교적 많은 유구와 유물을 남긴 곳이다. 드물게 보물이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보물 제370호 지정된 간월사 석조여래좌상.

◆온천단지에 포위된 천년고찰의 흔적

간월사지가 위치한 등억리의 겨울은 황량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등억리의 겨울 모습은 다른  폐사지 마을의 황량함과는 거리가 있다.

실패한 온천휴양단지, 온천 대신 모텔들만 우후죽순 들어서있는 등억리는 마을 전체가 버려진 듯한 느낌이다. 주말과 휴일 영남알프스복합웰컴센터를 중심으로 등산객들이 잠시 북적이기도 하지만 평일엔 찾는 사람이 거의 없다.

간월사 터는 온천 단지의 한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다. 영락없이 모텔들에 포위된 형국이다. 그나마 몇해 전 축조된 전통식 담장이 세상과의 경계를 지어놓고 있을 뿐이다. 

간월사지는 지난해 문화제청 주도로 대규모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지난 1984년 7월부터 1개월간 이뤄진 동아대박물관의 학술조사 이후 처음 이뤄진 공식 발굴조사다.

절터 일부가 경작지로 활용될 만큼 많이 훼손되었던 탓에 발굴조사에선 별다른 유구나 유적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지난달 공식적인 발굴조사가 종료됐다고 하지만 복구는 아직 이뤄지지 않았다.

현장관계자의 허락을 받고 폐사지에 발을 디뎠다. 비록 현장은 어지러웠지만 그동안 땅속에 꼭꼭 숨어 있던 석축 등 폐사지의 흔적들을 더 자세히 볼 수 있는 기회가 됐다.

보존각 앞에 세워져 있는 불상 2기. 머리 부분 등이 훼손된 것을 시멘트로 복원했다.

◆자장율사가 창건한 통일신라 유산

간월사는 신라 진덕왕 때 자장(慈藏) 스님이 창건한 사찰로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634년(인조 12)에 다시 복원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언양현호적대장’에 수록된 기록으로 보아 적어도 19세기 말까지는 사찰이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동아대 학술조사 당시 금당 터와 남·북 삼층석탑, 중문터, 동문터, 강당터를 비롯한 각종 건물지가 확인됐다.  

간월사의 창건 연대는 보물 제370호로 지정된 통일신라시대의 석조여래좌상과 파손된 석조여래좌상 2구(軀), 발굴 당시 출토된 청동여래상과 청동보살상, 각종 와당, 그리고 복원된 남·북 삼층석탑 등으로 보아 대략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중엽 이후로 추정되고 있다.

간월사가 세워진 시기는 자장이 중국에서 돌아와 왕립사찰인 경주 분황사의 주지로 임명된 이후로 추정된다. 자장율사는 분황사에서 자신이 배우고 정리한 불학을 고국 신라의 불제자들에게 전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런 분위기 속에 울산의 간월사가 세워진 것이다.

간월산 자락에 동쪽을 바라보고 위치한 절터는 지금 봐도 절집이 들어설 좋은 자리이다. 자장은 이 좋은 터에 절을 세운 후 제자들을 가르치고, 세상에 불교를 전파하려 했을 것이다.  

간월사지에서 탐방객의 눈길을 단박에 사로잡는 것이 남북 방향으로 서 있는 석탑 2기다. 금당터를 가운데 두고 50미터가량 떨어진 곳에 탑이 있다. 이는 통일 신라시대 이후의 전형적인 가람배치다.

남쪽 석탑은 이층 기단 덮개석이 새롭게 조각돼 있다. 아마도 폐사 후 흩어져 있던 탑재들을 모아 복원을 하면서 다시 제작한 듯하다. 이 석탑은 단아하면서도 활기찬 모습이다. 일층 몸돌에는 인왕상이 조각돼 있다. 

마주한 북쪽탑(동탑)은 평지에 있는 남쪽탑과 달리 암반위에 세워졌다. 형태는 남쪽탑과 거의 유사하고 몸돌에 인왕상을 새긴 점도 닮았다. 인왕상은 평면이 아니라 도드라지도록 새겼다.

금방이라도 불쑥 뛰어 나올 갓 같다. 각기 다른 표정 하나하나가 흥미를 돋우기에 충분하다. 금강역사라고 하는 인왕상은 부처의 세계로 이끄는 문을 지키는 수문장 격이다.

인왕상 사이로 문고리가 조각돼 있는 점도 특이하다. 인왕상과 문고리는 경주 장항리 폐사지에 있는 동탑에서도 발견된다. 

양 석탑 사이 금당터에는 불단이 놓여있었던 장대석, 기둥을 올렸던 주초의 석재들을 모아 두었다. 금당 앞에는 그동안 일부 흙에 묻혀있었던 석축이 온전한 모습으로 드러나 있다. 

아마도 울주군이 이 곳에 절집을 복원할 모양이다. 복원된 번듯한 금당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하지만 간월사지 주변은 세속과 너무 가까워져 버렸다. 간월사를 세웠던 자장의 염원이 온전히 이뤄질 수는 있을까. 

간월사지 북쪽 3층석탑. 도드라지도록 새겨진 인왕상이 압권이다.

◆친근한 이웃을 보는 듯한 미소 가득한 불상

간월사터 초입엔 간월사가 간직한 보물인 석조여래좌상(보물 제 370호)을 모신 보존각이 덩그런히 남았다. 다행히 문은 열려있었다. 내부에 들어서자 잠시 동안 머물던 어둠이 걷히고 석조여래좌상이 눈에 들어온다.

간월사지 석조여래좌상은 지난 1984년 흙 속에서 농부가 발견했다고 한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그 위로 상투 모양의 큼직한 머리(육계)가 자리 잡고 있다.

얼굴은 둥글고 풍만하며 단정한 입과 긴 눈, 짧은 귀 등의 표현에서 온화하고 인간적인 느낌을 준다. 어깨는 좁아지고, 몸은 양감이 없이 펑퍼짐한 모습이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얇으며 U자형의 옷 주름을 표현하고 있다. 근엄하기 보다는 친근한 이웃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이는 9세기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고 한다.

하지만 석조여래좌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뭔가 허전한 느낌을 감출 수가 없다. 마땅히 있어야할 광배는 흔적도 없고, 좌불의 전체적인 균형도 맞지 않다. 좌대와 석상도 어울리지 않는다.

이는 목과 팔 부분이 훼손된 채 발굴한 것을 시멘트 등을 사용해 어설프게 복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좌대도 원래의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발견된 것이다.

전혀 다른 불상을 모셨던 좌대위에 지금의 불상을 올려놓은 것이다. 그러나 좌대 그 자체로도 상당한 가치를 지닌다. 3단으로 되어있는 좌대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화려한 편이다. 사자상을 돋을 새김한 통일신라 후기의 작품인 것으로 추정된다.

보존각 앞에는 석불상 두 기와 부도 한 기가 놓여 있다. 석불상의 얼굴은 누군가가 시멘트로 만들어 올려놓은 것이고, 부도도 누구의 것인지 조차 알 수 없다고 한다.  

석조여래좌상을 보존하기 위해 근래에 세운 보존각.

◆철저한 고증 통해 울산의 자랑으로 거듭나길

옛 절터를 찾는 것은 과거로의 시간여행이다. 수천 년 그 자리를 지켜온 석탑과 흘러간 시간들이 화석처럼 굳어진 공간에서 옛 사람들의 자취를 만나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간월사지는 온천욕을 위해 나선 길, 혹은 신불산, 간월산 산행 길에 잠시 머물 수 있는 공간으로 충분하다.

철저한 고증과 복원이 이뤄져 자장이 남긴 신라고찰 간월사가 해오름시대 울산이 자랑할 만한 문화유산으로 거듭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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