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규성 울산박물관 학예연구원

전쟁은 많은 사회의 변화를 가져온다. 특히, 전쟁 당사국들은 전후 발생한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 오늘은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후 사회질서 회복을 위해 노력한 선조들의 모습을 고찰하고자 한다. 1592년 왜군이 침략하고 명나라 군대까지 가세한 치열했던 임진왜란은 1598년 끝났다. 그러나 전쟁이 낳은 후유증은 그대로 노출돼 있었다. 전쟁에서 남자들이 전사한 것 이외에 여성들도 많은 피해를 입었는데, 15만 왜군들이 우리의 전국토만 유린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부녀자들을 겁탈하는 등 인권을 유린했기 때문이었다. 

임란 후, 정조를 잃어버린 부녀자들과 원치 않게 태어난 아이들은 당시사회의 골칫거리가 됐다. 숭유억불 정책으로 유교 이데올로기가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터라 절개를 잃어버린 부녀자들이 발붙일 곳은 없었다. 여자들도 법적으로는 남자들과 똑같이 이혼도 하고, 재혼도 할 수 있었으나 현실에서는 녹록지 않았다. 심지어 여성이 재혼해 낳은 아이는 과거시험 응시자격을 주지 않을 정도였다. 전쟁으로 절개를 잃은 부인들은 남편들로 하여금 이혼을 당할 위기에 처해졌다. 당시 양반들은 철저한 유교주의에 몰입한 사람들이라 여성들을 이해하지 않았으며 용서도 하지 않았다. 당시 이혼은 국왕의 허가사항이라 그들은 국왕에게 이혼을 허가해 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분명 이것은 이혼사유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든 이혼을 허가하면 사회질서가 붕괴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임진왜란의 상흔이 채 치유되기도 전에 1627년(인조 5) 정묘호란과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발생했다. 그 결과 조선은 청과 군신관계를 맺게 됐고, 청나라는 조선에 경제적으로 조공을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인질로 잡아갔다. 주로 북쪽 지방에 사는 여인들의 피해가 컸다. 특히 의주에서 평양까지는 미인이 많아 벼슬아치나 양반의 처까지도 끌려갔다. 청나라에 끌려간 여자들 중 대부분 돌아올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중 많은 돈을 주고 협상해 돌아온 여자들이나, 탈출에 성공해 조국으로 돌아온 여자들을 ‘환향녀’로 부르면서 화냥년이란 말이 생겼다. 그들은 사회적 치욕을 감수해야만 했으며, 또한 남편으로부터 이혼을 요구받아야만 했다.  

이렇듯 양란 후, 조선 국왕 앞에는 군사체제의 정비, 피폐한 경제 회복, 백성들의 팍팍한 살림살이 등 해결해야할 많은 과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그 중 해결해야 할 난제 중의 난제가 바로 이혼문제였다. 이것은 조선 사회에서 큰 논란거리가 됐다. 선조, 인조 두 임금 모두 남자들의 이혼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첩을 허용해 양반들을 설득했다. 심지어 그럴듯한 구실을 만들어 사회 안정을 추구하기도 했다. 피해 여성들과 태어난 아이들이 이태원(異胎院)에 함께 모여 살 수 있도록 했으며, 인류학에서 말하는 일종의 정화의식을 시행하기도 했다. 청나라에서 돌아온 여성들을 홍제원 냇가에 모아 몸을 씻게 하고,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 잃게 된 정조가 죄가 된 것은 깨끗하게 씻으니, 이제부터 남자들이 이것을 더 이상 문제 삼지 못하게 했고, 여자들은 당당하게 살 수 있도록 했다.    

임금의 이 같은 노력에 많은 남자들은 임금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혼하지 않고 살았다. 비록 끝까지 무슨 여타의 구실을 달아서라도 이혼하려는 남자들도 있긴 했지만. 국가 통치 이념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혼을 허가해야만 하지만, 마찬가지로 국가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가정과 가족이 파괴되는 것은 막아야만 했기 때문에 통치자들의 고민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생각건대, 이데올로기보다 사람과 가족과 가정이 더 중요하는 것을 당시 임금은 알았던 것 같다. 

위와 같이 전후 어려움에 대처하는 선조들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국가는 초법적으로 모든 상황을 안고 그 해결방안을 찾아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국가의 의무가 아닐까. 현재 많은 정치지도자들이 염두에 둬야 할 대목이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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