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무 역할 했으나 北 윗선과 연계 없고 가족 있어 남은 듯
돌연사로 완전범죄 노린 화학물질 테러후 현지서 상황 주시 가능성도

 

김정남 암살 용의자로 체포된 리정철 [쿠알라룸푸르=연합뉴스]

말레이시아 당국이 19일 북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이복형 김정남 피살사건에 대한 중간 수사결과를 기자회견을 통해 밝힌 가운데 체포된 리정철(46)의 행적이 다시 관심이 끌고 있다.

말레이 당국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또 다른 용의자 리지현(33)·홍송학(34)·오종길(55)·리재남(57) 등 용의자 4명은 모두 출국했지만, 리정철은 쿠알라룸푸르 현지에서 머물다 체포됐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리정철의 역할에 대해 관심이 쏠리고 있다.

말레이시아 경찰 당국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북한 개입설에 대한 질문을 받고 북한 국적 용의자가 리정철 포함 5명, 그리고 연루자가 3명이라고 답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직접 북한 개입을 확인하지 않으면서도, 사실상 북한을 배후로 지목하는 언급이어서 주목됐다.

따라서 현지에서 도주한 북한 국적 용의자와 연루자가 김정남 독살사건을 주도하고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여성을 행동대원으로 고용해 범행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설득력을 얻고 있으며, 체포된 리정철의 역할에 대해서도 궁금증이 일고 있다.

말레이시아 언론매체들은 자국 경찰 당국 발표에 앞서 19일 리정철이 신분을 위장한 북한 특수요원일 가능성이 크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이들 매체는 주로 자국 당국자들의 말을 인용해 일반적으로 북한에서 파견된 노동자와는 달리 리정철이 외국인 노동자 신분증(i-KAD)을 갖고 말레이시아 수도 쿠알라룸푸르 외곽에서 아내, 자녀와 살아온 그의 '특수신분'에 집중했다.

[그래픽] 윤곽드러나는 김정남 암살 시니리오
[그래픽] 윤곽드러나는 김정남 암살 시니리오(서울=연합뉴스) 반종빈 기자 =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이복형 김정남 암살 사건과 관련한 여성 용의자들이 말레이시아 경찰에 모두 체포됐다. 경찰은 체포된 용의자들을 조사하는 한편 이들과 범행을 모의한 것으로 알려진 나머지 남성 용의자들도 추적하고 있다. bjbin@yna.co.kr

'더 스타'와 중국보(中國報), 성주일보(星洲日報) 등 말레이시아 언론은 19일 리정철이 항암제 등을 만드는 제약업체에서 근무하면서 말레이시아 주재 북한대사관 직원과 접촉을 해왔다면서 리정철의 역할에 주목했다.

아울러 북한의 대학에서 과학·약학 분야를 전공했던 리정철이 2000년 졸업 이후 인도 대학으로 유학을 가 화학과를 다녔고, 2010년께부터 1년여간 인도 동부 콜카타의 연구소에서 일한 적이 있으며 이후 북한으로 돌아갔다가 말레이시아에 있는 제약회사에 취업했다고도 소개했다.

말레이시아 경찰 당국도 이날 기자회견에서 자국 매체들의 이런 보도에 모두 확인하지는 않았으나 "리정철이 2016년 8월 6일 입국해 쿠알라룸푸르 소재 한 기업의 IT 부서에서 근무했다"고 밝혔다.

리정철의 이런 이력에 비춰볼 때 그가 김정남 암살사건에 깊숙하게 개입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화학물질을 이용한 독극물 테러로 김정남이 숨진 것으로 추정되는 가운데 리정철이 해당 독극물 제조와 베트남과 말레이시아 여성 2명을 범행에 참여시키는 데 모종의 역할을 한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온다.

김정남 암살을 위한 계획 수립, 여성 조력자 포섭, 살해 약물 준비 등에 리정철이 개입했을 것이라는 추론이 나온다.

그러나 리정철의 이력에서 장기간 공작원 교육을 받은 흔적이 없다는 점에서, 이번 김정남 암살사건을 주도한 리더는 아닐 것이라는 관측도 있는 게 사실이다.

이번 사건의 전개과정을 볼 때 주범은 이미 출국해버린 북한국적 용의자 4명 가운데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다.

리정철은 본국에서 파견된 암살단의 지시에 따라 실무적인 지원을 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말레이시아 현지 사정에 밝고 독극물과 관련한 전문지식을 갖고 있어 실무적인 역할에 그쳤을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현지 중문매체 동방(東方)일보는 리정철이 이번 암살 과정에서 중간 연락책 역할을 맡으면서 주범들에게 암살 실행을 위한 말레이시아 현지의 각종 정보를 제공하고 주범, 조력자들에게 각처의 숙소, 교통을 안배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소식통은 "리정철이 암살 실행시 공항 현장에 직접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4명의 북한 국적의 남성 용의자들을 맞아 현지 상황을 설명해주고 또다른 3명의 도피 연루자들과 연락을 했던 정황이 드러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현지에서는 김정남 암살 범행 이후 북한 국적 용의자 4명과 연루자 3명은 도주하는데도 왜 쿠알라룸푸르에 남았는지에 관심을 보인다. 말레이시아 당국의 수사가 시작되면 체포될 가능성이 있는데도 버틴 까닭이 무엇이냐는 것.

이와 관련, 동방일보는 리정철이 4명의 도주한 주범들에 의해 '안배된 희생양'일 것으로 추측했다.

신문은 소식통을 인용해 리정철이 희생양으로 설계된 인물일 것이라며 다른 주범들이 무사히 도피한 뒤 말레이시아를 떠나도록 안배됐을 것이라고 전했다.

현지 소식통은 "리정철 등을 포함한 범인들은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여성을 포섭해 개입시키고 독극물 자체를 확인할 수 없게 만들어 김정남이 공항에서 돌연사한 것으로 완전범죄를 노렸을 수도 있다"면서 "그런 가운데 북한 국적 범인들 가운데 누군가는 현지 상황을 지켜보면서 대응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남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소식통은 또 "만약 리정철이 쿠알라룸푸르에서 위장이 아닌 실제 가족과 산다면 쿠알라룸푸르를 떠나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다른 소식통은 "리정철이 구체적으로 북한 상부의 지시를 받은 암살단 리더가 아니라면, 체포된다고 하더라도 윗선 연계가 드러나지 않을 것으로 보고 리정철을 남겼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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