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 석시인·작가촌 ‘숲’ 촌장

신라 천년을 통틀어 최고의 충신을 꼽으라면 눌지왕 때 고구려와 왜국에 볼모로 잡혀있던 왕자를 구출하고 왜(일본)에서 장렬하게 죽은 박제상을 들 수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을 종합해 박제상 이야기를 추론하면, 박제상은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후예로 신라 5대 파사왕(婆娑王, 80-112)의 5세손이며 조부는 갈문왕(葛文王) 아도(阿道)이고 부친은 파진찬 물품(勿品)인데, 벼슬이 삽량주(지금의 양산)의 간(干, 태수격)이었다고 한다. 

일찍이 내물왕이 실성을 고구려에 인질로 보냈던 일이 있는데(실성은 392년 고구려에 인질로 갔다가 10년 후인 401년 귀국한다), 내물왕이 서거하자 내물왕의 아들이 아직 어려서 국인들이 실성을 왕으로 옹립한다. 실성은 고구려에 볼모로 잡혀갔던 그 원한으로 왕이 되자  내물왕의 아들인 미사흔(未斯欣)을 402년 왜(倭)의 인질로 보냈고, 이어 고구려에서도 인질을 청하자 다시 내물왕의 다른 아들인 복호(卜好)를 412년 고구려의 인질로 보냈다고 한다. 그 후 417년 내물왕의 아들인 눌지가 정변(쿠데타)를 일으켜 실성왕을 시해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니 이가 바로 제19대 눌지왕이다. 

왕은 항상 동생들을 그리워해 그들을 귀국시킬 방책을 구했다. 이에 신하들이 사신의 임무를 수행할 적임자로 박제상을 추천하자, 그는 먼저 고구려에 사신으로 파견돼 장수왕을 설득해 마침내 418년 정월에 복호를 구출해 함께 귀국한다. 이에 왕이 기뻐하면서 ‘내가 두 아우를 좌우의 팔과 같이 생각하는데, 지금 다만 한 팔을 얻었으니 이를 어찌하리오?’라고 한탄하니 제상은 죽기를 맹세하고 처자도 찾아보지 않은 채 율포(栗浦)에서 배를 타고 다시 왜로 향했다고 한다. 
제상의 부인이 이 말을 듣고 급히 달려 와 포구에 있는 배를 바라보면서 대성통곡하니, 제상이 뒤돌아보며, ‘내 큰 사명을 띠고 적국으로 들어가니 어찌 그대와 다시 만나보기를 기약할 수 있으리오’ 라는 마지막 말을 전하며 왜로 떠났다 한다.

가슴 저민 기다림에 다 무너진 동해 하늘
맺힌 한 응어리만 바위 되어 남아 있다
행여나 님이 오실까 굽어보는 먼 바다 

동해여! 님 앗아간 풍랑 거친 동해여
역신 같은 바람 일면 산과 바다 통곡하고
그 애원 삭히지 못해 망부석이 되었다

비운에 묻힌 슬픔 전설 되어 흐른 오늘
살아 그리움은 현해탄 꽃으로 피고
못다 핀 그리움만이 은을암에 머문다

                       -졸시 「치술령에서」 전문

바야흐로 미사흔은 제상의 목을 끌어안고 울면서 이별을 고하고 신라를 향해 탈출한다. 
한참 시간이 지나고 왜인들이 미사흔의 도망을 알게 돼 그 뒤를 추격했으나 운무가 끼어 더 이상 어쩌지 못하고, 제상을 포박해 왜왕에게 보내니 왜왕은 그를 목도木島(대마도)에 귀양 보냈다가 얼마 후 나무에 불을 질러 온 몸을 태운 후에 참수했다고 한다. 

박제상의 순국 소식을 들은 부인 김씨는 슬픔과 원한을 이기지 못해 딸 셋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 왜를 보면서 통곡하며 남편을 따라 정절로써 죽으려 하자, 딸 셋 또한 따라 죽으려 해 둘째 딸 아영(阿榮)에게 이르기를 ‘너는 살아남아서 네 동생 문량(文良)을 양육해 아버지의 후사를 잇게 하라’ 하고 부인 자신과 두 명의 딸, 즉 큰 딸 아기(阿奇), 막내 딸 아경(阿慶)은 함께 정절사 했는데 죽은 세 모녀의 시신은 곧 돌이 돼 망부석이 됐고 그 넋은 새가 돼 망부석 남쪽 십 여리에 떨어져 있는 국수봉 바위틈으로 날아가 숨었다고 한다. 

이에 후세 사람들이 새가 날아간 마을 이름을 비조(飛鳥·새가 날아감)라 했고 새가 숨은 바위를 은을암(隱乙岩·새가 숨은 바위)이라 했다. 현재 두동면 만화리에 비조(飛鳥)라는 마을이 있으며, 국수봉에서 척과 쪽 방향에 은을암이 있다. 
아직도 충, 효, 열의 망부석이 동해를 지켜보고, 박제상의 한 맺힌 설움을 춘3월의 매서운 찬바람이 대한민국 국운을 대변해 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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