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석근
전 울산광역시 지명위원

한일 월드컵 경기를 한 해 앞둔 2001년, 정부는 세계 각국의 선수와 임원 및 관광객들을 맞을 준비에 만전을 기하는 한편으로 새 주소 부여사업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고 그 추진에 박차를 가했다. 국민의 생활안전과 편의를 도모하고 한국을 찾는 외국인들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도로를 중심으로 새롭게 일련번호 형식의 주소를 부여한다는 것이 그 취지였다. 하지만 이 사업은 2009년 ‘도로명주소법’이 전면 개정되고서야 비로소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했다.

울산에선 동구가 가장 먼저 이 사업을 시작했다. 필자는 당시 지명위원으로서 이 작업에 동참했다. 오랫동안 사용돼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기존 지명과 주소를 재정비 하는 일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지명위원들과 관계기관 담당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하나 둘씩 문제점들을 풀어나가면서, 가나다 및 123 순으로 왼쪽 오른쪽의 주소를 부여하는 작업은 조금씩 가닥이 잡혀졌다. 이 작업은 동구를 넘어 남구, 중구, 북구, 울주군으로 이어졌고, 월드컵 경기가 끝난 2~3년 뒤엔 제대로 형태를 갖추고 새주소 사용에 대한 전국적인 홍보에 들어가게 됐다.

도로명주소의 시행과정에서 많은 지명이 바뀌거나 새롭게 지정됐다. 특히 ‘울산 8경’이 12경으로 확장돼 다시 태어났다. 산과 바다와 강이 있고 동서남북 자연풍광이 아름다운 울산이니, 기왕이면 12경으로 확대하는 것이 울산시민에게나 관광객들에게 다가가기 쉽지 않을까. 이렇게 필자가 발의하여 시행에 이르게 됐던 기억이 새롭다. 시민공모를 통해 ‘십리대밭교’가 태어나고, 이어서 ‘개울교’, ‘종가교’ 등 새 다리 이름이 생겨났다. 또한 동구 방어동과 남구 매암동을 잇는 교량이 ‘울산대교’로 명명돼 명실 공히 울산의 트레이드 마크로 자리잡게 됐다. 

그러나 아쉽게 생각되는 점이 있다. 울산의 도로에 인물 이름이 들어간 경우가 적다는 점이다. 염포삼거리와 동천강 하구를 잇는 ‘아산로’,  동천강 서안의 ‘외솔큰길’, 동천강 동안의 ‘고헌로’. 중구 서동 일대의 고복수길이 있으나, 다른 도시에 비해선 아주 빈약하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어쩌면 ‘공업도시’의 프레임에 우리 스스로가 아직도 매여 있기 때문은 아닐까.

울산에 인물이 모자랐던 것은 결코 아니다. 우선, 향리의 신분을 딛고 당상관으로 입신해 종2품의 높은 벼슬까지 오르며 한일외교를 주도했던 이예(李藝) 선생이 있다. 그는 세종대왕의 특별한 신임을 받으며, 1428년(세종 10)에 조선 최초의 ‘통신사’가 되어 일본국왕에게 파견됐다. 그는 왜구 및 어업권 문제로 꼬여있던 당시의 한일관계를 평화롭게 풀어냈다. 

1416년(태종 16)에는 직선거리로 1,500km나 떨어진 유구국(오키나와)까지 가서 포로 44명을 데리고 오는 등, 통산 660여명의 동포를 구출해 돌아왔다. 그는 왜인 입국을 통제하는 문인제도를 확립 했다. 

또한 조선 전기 한일 외교의 근간이 된 계해약조를 체결했다. 당시에 그는 이미 71세의 고령이었는데, 그 험한 바닷길을 마다않고 파견되어 사명을 수행했던 것이니 놀라운 일이다. 

2010년에 외교부는 그를 ‘우리 외교를 빛낸 인물’로 선정했으며, 서울 국립외교원에 그 동상을 세웠다. 국립외교원은 우리나라의 외교관을 양성하는 산실이다. 일본 대마도엔 ‘통신사이예공적비’가 서 있고, 울산 남구의 문화공원에도 그의 동상이 건립돼 있다. 문화공원은 울산시민 남녀노소 모두가 산책하고 휴식하며 여가를 즐기는 곳이다. 이렇듯 그는 어떤 문중의 대표가 아니라 울산의 인물, 국가의 위인이며 한일우호의 상징이다. 

새 도로는 그가 외교임무를 띄고 한양에서 일본으로 가던 길과 궤를 같이 한다. 통신사 일행의 사행록에 의하면, 통신사 일행은 경주 외동을 거쳐 농소로 넘어왔으며 동헌을 거쳐 웅촌으로 나아갔다. 울산대 한삼건 교수의 저서 『울산 중구 600년 도시를 걷다』에 의하면, 동헌-웅촌의 옛길은 삼호나루와 율리를 지나갔다. 농소-옥동간 새 도로는 농소-율리간 통신사 행로와 이처럼 근접해 있다. 

보도에 따르면 ‘이예로’는 시민공모의 결과로 가장 많은 추천을 받았다고 한다. 또 구민 의견수렴을 거쳐 남-중-북구청이 각각 압도적 1위로 제안한 이름이기도 하다. 기왕에 시민공모를 통해 이름을 짓기로 했으니, 이러한 시민여론을 충실히 반영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울산이 자랑하고 싶은 울산의 인물에 도로명을 부여하자. ‘공업도시’ 울산에 인문학적 향기를 입힐 수 있도록, 옥동-농소간 도로는 ‘이예로’로 명명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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