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식
前 울산대 교수

 

미중 정상회담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동양사에 문외한인 트럼프 미대통령에게 ‘한국은 역사적으로 중국의 일부다’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파문이 일고 있다.

시 주석의 한국역사관은 중화사상(中華思想)이란 오만한 중국의 ‘천하국가관’에서 기인한, 한마디로 말해 역사의식 부족에서 나온 것이다. 

우선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나당(羅唐)연합군에게 고구려가 멸망된 직후 당은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고 고구려 옛 땅을 다스리려 했다. 고구려 유민들이 당의 고구려 통합에 결사 항거하면서, 종전까지 적대관계였던 신라와 연합해 도호부를 한반도 밖으로 몰아냈다. 신라와 고구려의 합치된 단일세력의 강화된 힘에, 중국대륙의 거대한 신흥제국인 당도 신라의 삼국통일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당과 대항해 고구려의 부흥운동을 전개한 고구려유민들의 주도로 말갈세력과 함께(고구려 옛 영토인)만주지역에 발해국을 창건한 것도, 한(韓)민족이 당의 한(漢)족과 다르다는 민족주체성을 표명한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만주대륙에서 웅비(雄飛)했던 고구려를 계승할 의지를 가진 태조 왕건이 고려건국 초의 연호(年號)를 천수(天授)라 한 것과, 4대 광종도 광덕 등 독자적인 연호를 세우고 황제라 칭하면서, 수도인 개성을 황도(皇都), 평양을 서도(西都)라 했다. 이러한 것은 고려가 중국과 대등한 처지이며, 중국의 속방(屬邦)이 아니라는 주체성과 민족의식을 후손에게 설명해 주는 것이다. 

고려의 주체성과 민족의식은 여진, 거란, 몽골 등 이민족과의 투쟁에서도 빛나는 전과를 거뒀다. 특히 동서대륙을 제패한 몽골의 원제국도 30년간의 여몽전쟁에서 보여준 고려의 끈질긴 항몽정신(抗蒙精神)에 굴복해, 고려만은 끝내 주권을 빼앗지 못했다. 원 간섭기의 고려왕은 생활양식과 혈통에서도 몽골적 요소가 매우 짙었지만, 26대 충선왕과 31대 공민왕은 원에 기대고 있는 부원(附元)세력가를 배제하고 고려중심의 정치기강을 확립, 주체성과 민족의식을 살리려고 노력한 지도자였다. 비록 충선왕은 고려왕조보다 원에 충성경쟁을 벌이는 부원파와 몽골출신 왕비인 계국대장공주의 훼방으로, 왕위에서 물러나면서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공민왕은 권문세족의 득세로 몰락된 왕권을 강화시키고 원의 내정간섭에서 벗어난 주권회복으로 주체성을 찾는 개혁을 착수했다. 공민왕 즉위 초부터 추진한 개혁정치는, 홍언박 등 친왕세력이 원 순제의 제2황후인 기황후의 세력을 믿고 방자하고 오만했던 기철, 노책, 권겸 등 부원세력가를 전격 거세시켰다. 그리고 이들 이익의 산실인 정동행중서성이문소도 폐지시키고, 격하된 관제를 문종체제 관제로 되돌렸다. 더불어 원의 연호사용도 정지하는 등 반원(反元)정책을 펼쳤다. 이와 함께 원이 직접 통치한 고려영토인 화주(함경도 영흥)이북의 쌍성총관부를 99년 만에 수복하는 등 고려영토를 평북 대부분과 함경도 북청까지 확장했다. 

공민왕의 반원 개혁정치로 고려중심의 정치기강을 확립하고 주체성을 되찾게 됐다. 그렇지만, 공민왕의 개혁정치로 강화된 왕권과 자주성이 뿌리내리기 전에, 홍건적과 왜구침입의 외환(外患)으로 그의 개혁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일단락 된 병란(兵亂)으로 친왕세력과 대체된 무인세력이 권력의 핵심을 이루면서, 공민왕은 새로운 정치적 변혁을 시도했다. 공민왕은 당시 최고의 권력을 소유한 최영을 비롯한 무인세력을 전격 축출시키고, 왕권강화와 더불어 정치, 사회, 경제 등 국정의 적폐를 일소하려고 대대적인 개혁에 착수했다. 공민왕은 이러한 개혁 작업의 중심에 천인계통의 신돈을 내세워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을 설치, 권문세족이 부당하게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조사해 원주인에게 돌려주고, 양민이 되길 호소한 노비는 해방시켜 줬다.

신돈은 자신이 발탁한 임박을 중심으로 정몽주, 정도전, 윤소종 등 과거에 등제한 한미한 가문출신의 사대부 문신 들이 능력으로 승진하는 개혁제도를 만들고, 성균관중영(成均館重營)으로 자신의 개혁을 뒷받침하도록 했다. 이들이 공민왕과 신돈사이에서 자기성장을 하면서, 훗날 고려사회의 모순을 개혁하는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신돈이 권좌에서 실각하면서, 그의 죽음과 함께 공민왕의 개혁정책은 더 이상 시도되지 않았다.

반원 개혁정치로 고려의 주체성을 되찾은 공민왕은, 신돈의 개혁 속에서 정치적 신진세력으로 도약한(왕도정치를 실현하려는)사대부출신 문신세력과 손을 잡고 미완(未完)의 개혁정책인 사회 경제적 모순해결을 도모하지 않고, 축출한 무인세력과 부패한 권력집단인 권문세가의 재집권을 용인함으로써, 우리나라 역사상 주체성과 자주성이 가장 강했던 고려의 멸망을 재촉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지금 중국이 한국에게 사드 배치와 관련해 치졸한 보복을 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한국안보와 한미동맹에 직결되는 사드배치에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는 야권 정치인은, 중화제국(中華帝國)의 부활을 꿈꾸는 시진핑의 오만한 화이사상(華夷思想)에 따라 사드배치를 무력화시키려는 이이제이(以夷制夷)전략에 넘어가지 않는 것이, 그나마 대한민국의 주체성을 잃지 않는 것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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