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커장군은 파죽지세로 내려온 북한군을 낙동강 방어선(워커라인)에서 막아냈다. 한마디로 죽기 살기로 지켜냈다. 1950년 9월 낙동강 전선이 위태로울 때 부산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제주도나 태평양의 제3국 망명을 검토하고 있었다. 그 때 윌턴 해리스 워커 장군

(1899∼1950)은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한국을 끝까지 지키겠다’고 나섰다. ‘스탠드 오어 다이(Stand or Die), 사수하느냐 죽느냐 뿐’이라며 부하들을 독려해 방어선을 끝까지 지켜냈다. 
포항 영천 대구 창녕 마산 통영을 잇는 낙동강 방어선이 뚫렸다면 북한군의 부산 함락은 시간문제였다. 부산이 점령됐다면 그 해 9월 15일 맥아더 사령관의 인천상륙작전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은 워커 장군을 ‘낙동강의 영웅’이라고 했다.

미국은 6·25 전쟁으로 우리만큼 엄청난 아픔을 겪었다. 전사자 3만3,686명, 부상자 9만2,134명, 포로가 4,439명이다. 미국의 참전 용사중에는 아이젠하워, 벤프리트, 워커 장군의 아들 등 유명 인사의 자식도 142명이 참전해 35명이 전사했다. 한마디로 6·25 전쟁은 대한민국 뿐 아니라 미국의 전쟁이기도 했다. 더 가슴아픈것은 이런 희생에도 아직 ‘휴전’ 상태에서 그 끝을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우리는 수 많은 외침에 시달렸지만 동족상잔은 6·25 전쟁이 처음이었다. 1953년 휴전 이후 64년이 지났고, 이제 남은 공산주의 국가는 북한이 유일하다. 참전 미국 노병들은 한결같이 한반도의 통일을 기원하고 있다. 우리 국군, 미군, 유엔군, 학도병 등 모두가 헌신하고 희생 했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수레바퀴에 짓눌린 수 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고통으로 지켜온 대한민국이다. ‘끝나지 않은 전쟁’ 6·25를 기억하고 배우는 미국을 우리는 모르고 있다.

전쟁의 달 6월 이지만 추모의 열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수년 동안 천안함 폭침사건이나 5·18 민주화 운동 때 희생된 국가 유공자 얘기를 꺼낼 때마다 이념으로 부딪쳐 온 사회 분위기에 모두가 지친 기색이다. 매년 6월 누군가의 전쟁은 또 반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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