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보다 열대야 20일 이상 빨라 밤마다 더위 달래기 고역
빨래방·커피숍 등 시원하면 어디라도…에어컨 거실서 가족 취침

"여름밤이 원래 이 정도였나요. 힘드네요 힘들어."

'올여름은 더울 것'이라는 뉴스를 매년 접했지만, 올해만큼 무더위를 견디기 힘든 적은 없는 듯하다.

아직 7월이 가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은 말 그대로 더위에 '녹다운'됐다.

이는 한낮의 맹렬한 폭염 탓도 있지만, 그보다 밤에도 가시지 않는 열기를 책망하는 목소리가 더 크다.

낮 더위에 시달린 심신이 휴식할 여지를 차단한다는 점에서 밤의 더위는 얄밉기까지 하다.

열대야로 잠을 설치고, 몽롱한 상태로 낮의 폭염에 시달리고, 다시 밤에 잠을 못 이루는 나날이 반복되고 있다.

그럼에도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공원이나 대형마트를 찾는 고전적 방법은 여전하고, 운동으로 '이열치열'을 실천하거나 다양한 '쿨링' 제품으로 더위를 이기는 사람들도 있다.

온 가족이 에어컨을 튼 거실에 모여서 자거나, 밖으로 나온 동네 주민들이 뜻하지 않게 '심야 반상회'를 하는 이색 풍경도 생겼다.

갖가지 방법으로 밤의 더위를 극복하는 '열대야 생존법 백태'를 소개한다.

열대야가 나타난 12일 오후 서울 반포한강공원에서 시민들이 무더위를 피해 휴식을 즐기고 있다.

◇ 작년보다 일찍 시작된 열대야…20일 이상 빨라진 지역도

기상청이 2009년 정립한 열대야 기준은 '전날 오후 6시부터 다음 날 오전 9시까지 최저 기온이 25도 이상 유지되는 날'이다.

올해는 6월 30일 강원 강릉과 경북 포항 등지에서 열대야가 전국 처음 발생해 지난해 최초 발생일(7월 1일·포항)보다 하루 빨랐다.

그러나 지역별로는 열대야 발생일이 크게 앞당겨진 곳이 적지 않다.

서울은 이달 11일 열대야가 발생, 작년보다 열흘 빨리 시작됐다. 이달 1일 열대야가 나타난 울산, 제주 서귀포도 각각 23일과 20일이나 빨라졌다.

전북 부안, 전남 장흥·해남, 경북 영덕·영천, 경남 합천 등도 저마다 25∼27일이나 빨리 열대야를 맞았다.

이달 20일 현재까지 올해 열대야가 많이 발생한 지역은 제주(15일), 서귀포·포항(14일), 강릉(12일) 등이다. 반면 파주·대관령·울릉도·태백·남원 등지는 한 번도 열대야가 없었다.

통상 열대야는 농촌보다는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덮인 도시에서 잦다.

제주는 내륙보다 천천히 데워지고 천천히 식는 바다의 영향으로 열대야가 가장 극심한 지역으로 꼽힌다.

열대야 피해 도심 탈출…대관령 북적
강원 강릉지역의 21일 아침 최저기온이 한낮 기온을 방불케 하는 30.1도를 기록한 가운데 밤낮없는 무더위로 잠을 이루지 못한 주민들이 열대야를 피해 도심을 탈출, 시원한 바람이 부는 대관령에서 밤을 보내고 있다.사진은 21일 오전 4시께의 대관령 모습이다.

◇ 공원·강가는 밤마다 북적…텐트서 자고 출근하기도

바람이 시원한 공원이나 강가는 대표적인 열대야 피서지다.

세종시 보람동에 사는 김모(45·회사원)씨는 요즘 초등학교 5학년 아들과 함께 아파트 인근 금강 수변공원에서 텐트를 치고 한동안 시간을 보낸다. 여름밤 더위 때문에 생긴 불면증을 해소하기 위해서다.

공원 온도는 아파트 거실보다 2∼3도 정도는 낮다고 김씨는 말한다.

그는 "강바람이 솔솔 불어와 누워 있으면 확실히 잠이 잘 온다"며 "새벽에는 추워서 침낭으로 들어가기도 한다"고 했다.

금강 수변공원에는 금강을 따라 텐트를 칠 수 있는 장소 50여 곳이 있다.

울산시 울주군 범서읍에 사는 박모(50)씨도 후덥지근한 저녁이면 아파트 앞 태화강변에 밤마다 텐트를 친다. 그는 아예 텐트에서 밤을 보낸 뒤 아침에 집에 들어가 출근 준비를 한다.

박씨는 "집에서 에어컨을 켰다 껐다 하느라 잠을 설치는 것보다는 아예 텐트가 잠자기가 낫다"고 말했다.

강원도 평창군 옛 영동고속도로 대관령 휴게소 광장도 밤마다 캠핑카와 텐트로 북적인다.

해발 830m의 이곳은 한여름에도 이불 없이는 추워서 잘 수 없을 정도다. 강릉과 불과 20분 거리지만, 기온은 하늘과 땅 차이다.

여름철 극심한 더위로 '대프리카'라는 별칭을 얻은 대구에서는 선선한 바람을 쐴 수 있는 수성못과 두류공원, 강정고령보 등이 여름밤 피서 명소다.

인천 서구 경인아라뱃길 시천교 광장, 제주 한라산 중턱 야영장, 경남 창원시 용지호수 등도 밤의 피서지다.

부산 찜통더위 밤에도 물놀이
부산지역에 폭염특보가 계속된 16일 오후 부산 사하구 다대포해수욕장에 있는 꿈의 낙조분수에서 시민들이 물놀이를 하며 더위를 식히고 있다.

◇ 장보기·세탁 미뤘다가 저녁에…쿨링 제품도 인기

시원한 자연 바람을 찾기가 여의치 않다면 공짜 에어컨 바람을 쐬는 것도 방법이다.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으로 자정까지 영업하는 대형마트를 찾아 장을 보는 올빼미 쇼핑족이 대표적이다.

창원에 거주하는 우모(28·여)씨는 "아이들과 일부러 밤늦게 집을 나와 근처 마트에서 장을 본다"며 "마트 에어컨 바람이 시원해 피서왔다는 느낌으로 천천히 마트를 한 바퀴 돌곤 한다"고 말했다.

대전 유성구의 한 무인 세탁방에는 밤손님이 늘었다. 24시간 운영하는 이곳에 밀린 빨래도 하면서 더위를 식히는 나홀로족들이 몰리기 때문이다.

세탁방 업주는 "안마의자도 있고 TV도 잘 나오니 한동안 시간을 보내는 손님들이 많다"면서 "전기요금 때문에 에어컨 온도를 조금 높게 설정했는데도 확실히 다른 계절보다 손님이 늘었다"고 밝혔다.

이밖에 영화관, 서점, 커피숍도 밤손님이 많은 에어컨 명당이다.

더위를 식혀주는 '쿨링' 제품에 의존하는 사람도 늘었다.

대전에 사는 이모(53)씨는 통풍이 잘되는 거실 창문 옆에 인터넷에서 산 5만원짜리 쿨매트를 깔았다.

이씨는 "에어컨보다 훨씬 낫다"면서 "올해는 쿨 매트 덕분에 쿨쿨 잘 수 있겠다"면서 제품을 추켜세웠다.

인천의 범모(28)씨는 몸에 붙이는 쿨링파스를 잔뜩 사들였다. 틀어놓을 때만 잠시 시원한 에어컨과 선풍기로는 열대야를 쫓을 수 없어서다.

범씨는 "파스를 목 뒤나 다리에 붙이고 있으면 그나마 덜 덥다"면서 "에어컨을 계속 틀기에는 전기요금이 부담돼 다른 쿨링 아이템도 찾아보고 있다"고 말했다.

'찜통더위' 열대야 지속 

◇ 운동으로 이열치열, 온 가족이 모처럼 한방에…이색 풍경도

일부러 땀을 흘려 더위를 쫓는 사람도 적지 않다.

대구 수성구 대구스타디움과 신천 주변 산책로 등에서는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도 운동복을 입고 달리거나 친구들과 농구, 배드민턴 등을 하는 시민들을 볼 수 있다.

시민 최모(39)씨는 "땀을 흘리며 뛰면 살도 빼고 더위도 잊을 수 있다"며 "오히려 운동으로 땀을 흘리면 상쾌한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경기도 고양에 사는 윤모(30·여)씨도 요즘 저녁 식사 후 일산호수공원으로 산책하러 나간다. 평소 산책을 즐기지 않았지만, 최근 열대야를 이기고자 나름 수를 낸 것이다.

윤씨는 "시원한 분수를 보며 스트레스도 풀고, 적당히 땀을 뺀 후 씻고 자면 잠도 잘 온다"고 말했다.

한밤의 더위가 가족과 이웃을 한자리에 모으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아파트 단지에서는 한낮에 달궈진 주택 내부가 밤늦게까지 식지 않아 거실이나 안방에서 온 가족이 함께 잠을 청하는 사례가 늘었다.

에어컨이 거실이나 안방에만 설치된 탓에 에어컨이 없는 방에서 생활하는 수험생이나 어린 자녀들이 더위를 호소, 여름 홑이불을 펴고 온 가족이 한방에서 자는 옛 풍경이 연출되는 것이다.

부산 수영구 망미동의 한 아파트에서는 잠 못 이루는 주민들이 더위를 피해 놀이터로 몰려나와 오랜만에 서로 인사를 나누고 안면을 익히는 '야밤 반상회'도 열리고 있다.

저작권자 © 울산매일 - 울산최초, 최고의 조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