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언어 기억되는 말 되려면
객관 비평·평가의 검열 거쳐야
주관적 판단 잘못된 결과 불러

서전 이상숙 시인의 시비 건립
작품 판단 후 해도 늦지 않아
선결과제 무시땐 시비만 초래

 

문 영시인·비평가

문학은 언어 예술이고 언어로 남는 예술이다. 그렇다고 모든 문학의 언어가 영원히 남고 기억되지는 않는다. 

삶이 그렇듯이 시간 속에서 문학의 언어도 망(亡)한다. 망하면서 기억되는 언어가 문학이다. 시간을 견디고 살아남는 언어가 진정한 문학의 언어다. 

한국시에 있어서 소월과 백석, 지용과 목월 등의 언어가 그렇다. 또한 삶은 자랑할 게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문학의 언어다. 자랑할 게 없다는 말은 바닥이고 겸손의 언어다. 

심보르스카가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에서 말한 “나는 모르겠어”라는 의식의 언어다. 

진정한 문학인이라면 끊임없이 “나는 모르겠어”를 되풀이해야 한다. 자랑할 게 없다고 말함으로써 삶의 가치를 발견해내고, “모르겠어”라고 말함으로써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사람들에게 문학은 진정성의 언어를 안겨준다.

마치 삶과 문학을 다 아는 듯이 자랑하고 허명하는 사람의 언어는 망하고 기억되지 않는다. 이렇듯 우리나라 시문학사에도 이름만 기억되고 작품이 기억되지 않는 시인이 있다. 

반대로 이름은 기억되지 않는데 작품이 기억되는 시인이 있다. 이름이 아니라 작품으로 기억되는 시인이 참된 시인이다. 그런 시인이 함형수이고, 그는 <해바라기의 비명>이라는 시 한 편으로 한국시문학사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시는 망하면서 기억되는 언어와 자랑할 게 없는 삶을 고백함으로서 삶의 가치(열정)를 발견해내는 점이 뭉클하다. 5행의 짧은, 이 시에서 이름과 관련해 내가 주목하는 부분은 첫 행과 둘째 행이다.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거운 빗(碑)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이다. 시인은 죽음의 언어인 ‘차가운 비석 돌’을 거부하고, 열정적인 삶을 향한 ‘노오란 해바라기’의 언어를 노래한다. 유언이 이토록 밝고 강렬하다. 

문학의 언어가 기억되는 언어로 남으려면 무엇보다도 작품의 문학성이 선행돼야 한다. 문학성 판단은 객관적인 근거에 의한 비평과 작품에 대한 평가의 검열을 거쳐야 한다. 

이러한 평가와 여러 사람들의 공감과 동의 없이 지엽적이고 인간관계에 의한 사적이며 주관적으로 작품을 재단하고 평가하는 것은 온당치 못한 결과를 가져온다. 

최근 몇몇 분들에게 논의되고 있는 서전 이상숙 시비 건립은 이런 점에서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왜냐하면 사적인 장소에다 시비를 건립하고 시인을 추모하는 것은 누가 뭐라고 관여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시비를 비롯한 건축물이 공공의 장소에 설치하고자 할 때에는 문제가 달라진다. 

서전 이상숙 시인이 초기 울산문단에 기여하면서 문화 활동을 했고 서울에 가서 시집 <나는 위험한 존재> 등 여러 권의 시집을 발행하면서 문학 활동도 열심히 했다. 

그리고 울산을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작품을 많이 남겼다. 이 같은 그의 행적은 결코 과소평가될 일은 아니다. 그러나 문학의 작품 평가는 엄밀하고 공정해야 한다. 

그의 시가 아직도 제대로 논의되고 평가되지 않은 상태이다. 이 말은 서전의 작품이 평가절하 됐다는 의미가 아니라 서전의 시비가 공공장소에 놓이기 위해서는 그의 작품이 기억에 남을 언어로서의 보편성과 문학성을 어느 정도를 지니고 있는지를 검토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섣부른 시비 건립은 시비를 낳는다. 

그리고 이미 문학적 성과와 평가가 내려진 오영수나 조순규 시조 시인, 이기원 시인, 박상지 소설가 등과의 형평성 문제도 제기될 수 있다. 

군말이지만 문학에서 작품이 작가와 시인보다 우선한다. 그래서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고 고인이 된 황순원 작가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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