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되면 생각이 많아진다. 높고 푸른 하늘 위로 문득 그리운 얼굴이 흐른다. 아득한 기억 저편에 서있는 ‘그 사람 이름은 잊었다.’ 얼굴도 아련하다. 다만 ‘그 눈동자 입술’만 남았다. 박인환 시인의 즉흥시에 이진섭의 멜로디. 가을을 닮은 목소리의 주인공, 박인희가 부른 ‘세월이 가면’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것”이라는 짧고 외로운 문장 앞에 ‘가고, 남는’ 두 동사 사이에서 인생은 그저 힘겹게 머뭇거리다, 사랑은 겨우 몇몇 추억으로 남는다. 그 조차도 언젠가 지워질 것이다. 사랑이 거닐던 “여름날의 호숫가”와 “가을의 공원”은 설렘과 기쁨의 밀어로 반짝였다. 하지만 시간의 윤기는 금세 사라지고, 연인이 떠난 그 곳은 어느덧 퇴락을 맞이한다.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무잎은 흙이 되고/ 나무잎에 덮여서” 시나브로 추억의 책장은 사라지고만다. 

그리고 한 줄 가사가 이어진다.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추억만은 영원할 것이라는 믿음과, 그것도 부질 없으리라는 생각 사이에서 사랑의 잔영은 “내 서늘한 가슴에” 깃든다. 선들바람이 분다. 마음이나 말은 작은 바람이 되고, 기억이나 영혼은 큰 바람이 된다고 했다. 바람이 불고 누군가 태어났다. 바람이 불고 누군가 죽었다. 생성과 소멸, 어김 없음과 아무렇지도 않음이 바람에 실려왔다, 실려간다.

우리들은 대부분 미래를 위해 현재를 산다. 지금 이 순간이 중요하니 이 순간을 즐기라고 하지만 좋은 미래를 위해 발을 동동거리며 살아간다. 좋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즐길 여유가 없다. 
여름은 열렬했다. 모든것은 온힘을 다해 발돋움했다. 가을의 열망이 가득한 자리, 맑고 고요하다. 계절은 곧 비우고 떨구기 시작한다. 모든 것은 어디론가 뿔뿔이 떠나고, 북쪽에서 차가운 바람이 내려오면 기억들은 저 먼 망각의 숲으로 불려가고, 그리운 것들은 낯선 어느 계절의 노래로 흩어질 것이다. 떠나는 것은 그만큼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세월은 가도 옛날은 남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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