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 민주화항쟁’ ‘6·29 선언’ 통해 등장
 민주화 과도기면서 새로운 문제점 대두
 자유민주주의 꽃망울 피운 시작점 의의

임정식 울산시선관위 홍보과장

1987년 10월 27일 국민투표로 확정된 제6공화국 헌법에 따라 12월 16일 실시된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가 당선, 88년 2월 25일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출범한 여섯번째 공화헌정체제이다. 6·10 민주화항쟁과 6·29선언을 통해 등장한 제6공화국은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큰 변곡점이었다. 우선 헌정사상 최초로 여야합의에 의해 헌법이 개정됐으며, 이 개정헌법에 따라 15년 만에 대통령 직선제 선거가 이뤄졌다. 그리고 5공청산과 함께 군부에 의한 권위주의체제에서 진정한 민주주의 체제로 전환을 시도한 과도기로 평가받는다.

이 시기 여당인 민주정의당은 제5공화국에서 출발해 제6공화국으로 이어지고 있다. 87년 6월 항쟁의 위기를 6·29선언으로 수습하고, 12월 16일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했다. 그러나 제13대 총선에서 총 299석 중 125석을 차지해 여소야대(與小野大) 정국을 맞이했다. 이후 90년 1월 22일 민정당의 노태우 대통령,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총재, 신민주공화당의 김종필 총재가 3당합당을 선언하고 그 후 90년 2월 15일 민주자유당이 공식 출범하면서 민정당은 해체됐다. 야당들은 평화민주당, 통일민주당, 신민주공화당, 민주한국당, 한국국민당, 신한민주당, 민중의당 등과 기타 여러 정당들이 활동했다.

 먼저 평화민주당은 김영삼과 함께 통일민주당을 창당한 김대중이 대내·외 후보단일화 압력을 뿌리치고 제13대 대통령후보 단독출마를 결심하면서분당을 선언하고 창당했다. 김대중을 대통령후보로 추대해 제13대 대통령선거전에 임했으나 3위에 그쳤다. 이 후 총선에서 제1야당이 됐으나  ‘5공청산’ 후, 3당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창당되면서 여대야소가 되어 어려운 국면을 맞게 됐다. 91년 4월 신민주연합당(약칭 신민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9월 10일 민주당 잔류파인 이기택과 재야입당파인 이부영 등의 민주당과 합당해 ‘민주당’을 출범시키고 해체됐다.

다음으로 통일민주당을 살펴보면,  김영삼과 김대중이 제1야당이던 신한민주당(新韓民主黨)에서 동교동계, 상도동계를 탈당시켜 통일민주당을 창당했다. 안기부가 개입한 일명 ‘용팔이 사건’등으로 출발은 순탄치 않았으나, 우여곡절 끝에 69명의 국회의원을 확보, 5월 1일 제1야당으로 출범했다.
이후 야당의 대통령 후보 선출문제를 놓고 대립하다 10월 29일 김대중을 지지하는 동교동계 의원들이 집단 탈당해 평화민주당을 창당함으로써 분열됐다. 통일민주당은 김영삼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고 제13대 대선에 참여했으나 노태우 후보에게 패배했다.

신민주공화당은 6·29선언 이후 구공화당 총재 김종필의 정계복귀 선언을 계기로 구공화당 시절의 각료·의원들을 중심으로 87년 10월 30일 출범한 정당이다. 제13대 대선에 출마한 김종필은 4위에 그쳤다. 13대 국회 초기에는 다른 야당과 협조관계를 유지, 야당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으나, 점차 보수성향을 드러내 민정당과 협조방향으로 나아갔고, 89년 1월 22일 민자당이 출범하면서 그 속에 흡수·통합됐다.

제6공화국은 민주화의 과도기로 평가 받으면서도 새로운 문제점들이 대두됐다. 구체적으로 87년 대선을 앞두고 전라, 충청, 대구·경북, 부산·경남을 기반으로 하는 지역기반 정당 탄생과 이들 정당의 당수 1인에 의한 보스정치가 이뤄지기 시작했고, 정당운영 또한 비민주적이었다.  
그러나 제6공화국은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1948년 5·10선거를 통한 정부수립이후 피어나지 못한 자유민주주의의 작은 꽃망울들을 하나둘씩 피워내기 시작한 시점이라는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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