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0년 전 청나라 노획물로 끌려가는 수모 겪은 조선인
美 대북제재 그대로 따르기만 해선 역사 그대로 답습
주변국 간섭 견제하고 당사국으로서 대북정책 펼쳐야

 

변윤환 대기관리기술사, 전 울산지역환경보전협의회 상임이사

인조가 청나라의 침입으로 남한산성에 들어온 지 46일째 되는 1637년 1월 30일, 청 태종 홍타이지에게 항복의 예로 삼배구고두례, 즉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의식을 행했다. 문제는 인조의 목숨 값과 같은 항복 조건들을 받아들이는데, 청 군이 전쟁의 노획물로 잡아간 조선인은 청의 군사들이 목숨을 걸고 싸워 얻은 성과물이므로, 조선에서 데려가고 싶다면 정당한 가격을 치르라고 강요했다. 청군에게 사로잡힌 조선인들은 조선으로 도망쳐오면 반드시 체포해 다시 청의 주인에게 돌려보내라는 항복 조항이다. 이 조항이 훗날 조선 사회에서 엄청난 비극의 씨앗으로 남게 된다. 그 당시 주화파 최명길은 명나라 도독 진홍범에게 보낸 외교문서에서 청으로 잡혀간 조선인 숫자를 50만 명으로 추정했다. 인조가 남한산성에 피신해 있는 동안 서울 등 중부 이북지역에서는 청군에 의해 인간사냥이 자행됐다.

조선인이 전쟁 노획물로 잡혀가는 과정에서 청군은 아이가 있는 여자라고 봐주지 않았다. 여인들을 끌고 가면서 아이들을 죽이거나 내팽개치는 만행을 저질렀다. 

심양에서의 삶은 졸지에 청군 장수의 첩이 됨에 따라 본처들이 투기로 참혹하게 학대한 자들이 많았는데, 조선 여인들에게 뜨거운 물을 끼얹거나 혹심한 고문을 가하는 여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청 태종 홍타이지가 본처들의 악행을 막으려고 했던 조치가 남편이 죽었을 때 같이 순장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는 것을 보면 조선 여성들의 고난이 얼마나 처참했던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심양에서 탈출하는 조선인이 1637년 8월 용골대는 매일 1,000명에 이른다고 말했을 정도이다. 「심양장계瀋陽狀啓」에 보면 탈출과정에서 붙잡힌 조선인은 발뒤꿈치를 잘렸다는 기록이 있으며, 청이 사신을 보내 조선으로 탈출한 조선인들을 잡아 보내라는 집요한 요청으로, 조선 귀환 이후에도 조선 관리들의 체포를 피해야만 했다. 

이상은 역사학자 한명기 교수가 조선왕조실록 등 조선·중국·일본의 사서와 문집, 저서, 논문 등 수백권의 문헌을 인용하여 쓴 ‘역사 평설 병자호란’을 읽고 전쟁의 참화와 비극의 기록들을 필자가 일부 인용했는데, 인조는 국정을 농락한 공신들을 처벌하려 들지 않았으며, 이괄의 난으로 공주로 피난해야 했고,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는 무능한 군주의 극치를 보였다. 500년 조선 역사를 자랑스럽게 여기기보다, 두세 번 새로운 왕조로 교체되었더라면 임진왜란·병자호란, 일본 식민지배와 같은 참담한 비극을 피할 수 있었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배고파서 또는 자유를 찾아 탈북해 죽음과 같은 북송의 위험과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 신분 없는 삶이나 380년 전 전쟁의 노획물이 되어 끌려간 조선인의 처지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현재 세계가 한반도의 안보 위기를 주목하고 있는데, 굳건한 한미동맹을 강조하며 백퍼센트 한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일부 보수진영에서 주장하지만 한반도에서 군사적 행동을 동의해서는 안 된다. 한미동맹에 균열이 생기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당사자인 우리는 한반도에서의 군사적 행동에는 분명히 반대해야 한다. 군사적 행동은 바로 한반도에서 전쟁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1990년에 동서독의 통일에도 서로 이념이나 체제가 달라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적대적 정책을 피하고 인적 물적 교류와 경제적 지원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하여 신뢰를 쌓아 통일을 이루었듯, 우리의 현재 대북 정책도 미국과 UN이 공동으로 북핵에 대해 대북 제재를 하되, 그 외 대북 적대 정책은 당사국으로 달리할 필요가 있다. 독일 국민처럼 1등 국민이 되기 위해서는 남북이 소통하고 신뢰 회복하여 점차 교류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하며, 당리당략이나 진영 논리를 떠나 일관되게 대북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이것이 한반도의 위기를 막고 주변 강대국의 간섭을 완화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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