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으로 중국 대륙 정세가 급변하면 조선은 갈피를 잡기가 어려웠다. 명나라가 쇠퇴하고 청나라가 솟아오르던 이른바 명·청 교체기의 조선은 혼란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명나라를 대국으로 섬겨왔던 조선의 수구세력들은 욱일승천의 기세로 솟아오르는 신흥 강국 후금(後金)을 오랑캐의 준동쯤으로 여겼다.

정묘·병자호란 전 광해군은 명나라 대신 신흥 강국 후금을 인정하고 등거리 외교를 펼쳤다. 후금과의 전쟁에 군사를 보내라는 명나라 요청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임진왜란으로 망가진 나라를 또 전쟁에 휘말리지 않도록 하겠다는 뜻이요 의지였다.

하지만 1623년, 광해군은 보수파에 의해 축출되고 즉위한 인조는 광해군이 암암리에 추진해 온 실리외교에 대한 방향 전환에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반정 세력에 의해 옹립된 인조인지라 광해군의 향금정책(向金政策)을 지지할 수 없었다. 훈구 대신들은 향명배금(向明排金)이 의리를 지키는 길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연유로 1627년(인조5)에 정묘호란(丁卯胡亂)을,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이라는 치욕의 대란을 겪어야 했다. 당초 정묘호란이라는 1차 경고를 받았지만 ‘향명’이라는 명분론에 사로잡힌 서인 정권은 반대파에 대한 정치적 탄압에만 골몰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미국과의 외교를 중시하면서도 중국과의 관계도 더욱 돈독하게 만드는 균형 있는 외교를 주장했다. 이에 대해 자유한국당은 “미국과의 군사 동맹과 북한과 여전히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중국과의 관계는 차원이 다르며, 문 대통령은 시대착오적인 ‘광해군 코스프레’를 즉각 그만둬야 한다”고 했다.

‘북방균형외교’를 추구했던 광해군의 개혁이 실패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인조 정권이 명분론을 버리고 힘의 변화를 직시하지 못한점이 두고두고 아쉽다. 이 시각 미국이 한국의 치밀하지 못한 이중 플레이에 식상하고 일부 세력의 반미운동에 환멸을 느껴 한국에서 철수하는 상황도 예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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