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섭게 늘어나는 많은 책중에 ‘어느 책을 골라 읽어야 하느냐’는 어렵기 그지없는 일이다.『독서술』을 써서 유명한 프랑스 비평가 에밀 포아게는 인생에서 남녀가 만나듯 책과 만나는 것이라고 했다. 이 세상의 그 많은 남녀 가운데 오다가다 우연히 만나건 누군가 중매를 하건 또 스승이나 선배가 소개를 해주건 그렇게 만나 상대로부터 이해와 감명을 받으면 되는 것이라 했다.

조선 세조 때 대문장가 김수온의 독서법은 별났다. 책장을 찢어 먹어버렸다. 일단 익히기로 작정한 책이면 한 장씩 찢어 소매 속에 넣어 간직했다. 길가다가 한 장씩 꺼내 외웠는데 외웠다 싶으면 그 대목을 찢어 지환(紙丸)을 만든 다음 환약 먹듯이 삼켜버렸다. 그는 책 속의 지식을 입을 통해 몸 속에 들여놓지 않고는 배겨내지 못했다. 탐욕이 극에 달한 지식욕이 아닐 수 없다.

그 시절 ‘책거리’ 혹은 ‘책씻이’라는 풍습이 또 의미심장했다. 서당에서 학동이 책 한 권을 떼거나 베끼는 일이 끝나면 훈장과 동료에게 한 턱 내는 일이었다. 책을 읽고 지식을 습득했다면 마음의 재물이 되니 성취의 결과로 그냥 넘길 일이 아니었다.

포항지진(11월 15일)으로 수능 연기가 발표되자 혼란에 빠진 수험생들이 많았다. 수능 문제집과 참고서 등 책을 버린 학생들이 서점에서 책을 새로 사서 공부하고 있다는 것이다. 2007년부터 시작된 수능 전날 책을 버리는 의식(儀式) 때문이다. 부정행위 예방을 위해 교실 개인 물품을 버리면서 시작됐다는 것이다. 

또 어떤 학생은 ‘시험에 결코 떨어지지 않겠다’는 의지를 다지려는 뜻에서 책을 버리기도 했다. 학생들이 수능 전날 책을 버리는 것을 전쟁터에 나가는 ‘출정(出征) 행사’처럼 생각하거나 해방감을 만끽하기 위해 책을 버리는 학생들도 있다는 것이다.

수능 전날 ‘책 버리기’는 공부하느라 고락을 함께해 온 소중한 책을 후배들에게 물려주던 ‘책물림’이나 성취의 결과로 한 턱 낸 ‘책거리’ 풍습을 떠올리는 별난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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