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경비구역은 최후의 냉전 현장
북한병사 귀순 장면은 대탈주 영화
1998년 북 경비장교 JSA 첫 귀순

1959년 소련통신기자 이동준 귀순
1967년 북중앙통신 이수근 탈출후
69년 북한 돌아가려다 월남서 덜미

 

김병길 주필

높이 15cm, 폭 50cm의 콘크리트 경계석(군사분계선·MDL)이 남북을 가르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Joint Security Area)은 지구상 마지막으로 남은 냉전 현장이다. 전쟁도 평화도 유보된 채 한반도 정전체제의 심장부인 JSA의 시간은 1953년 7월 27일(정전협정 체결일)에 멈춰있다.

JSA는 휴전 직후인 1953년 10월 유엔사와 공산 진영 사이에 군사정전위원회 운영을 위해 MDL 중간에 설정됐다. 동서 800m, 남북 400m 타원형 지대다. 서울에서 북서쪽으로 62km, 평양에서 남쪽으로 215km 떨어져 있다. 10km만 올라가면 개성이다. 

한때 JSA 내에는 남북을 가르는  MDL이 따로 없었다. 양측이 뒤섞여 근무하면서 물건을 주고 받기도 했다. 하지만 1976년 8월 18일 ‘도끼만행 사건’으로 모든게 바뀌었다. 이후 남북 간 살얼음판 대치와 상호 감시가 시작됐지만 1984년 11월 23일 또다시 총격 사건이 터졌다. JSA 북측 지역에 있던 소련인 관광객이 돌연 MDL을 넘어 남측 자유의 집으로 달려온 것이다. 이를 뒤쫓아 북한군들도 MDL을 넘어와 양측 간 교전이 벌어졌다. 북한군 3명이 사망하고, 5명이 다쳤다. 유엔군 소속 장명기 상병이 전사했다.

이밖에도 북한군은 1990년대 초 MDL을 고의로 침범하거나 인근 대성동 마을 주민을 납치하는 등 도발을 이어왔다. 북한군의 JSA 귀순 첫 사례는 1998년 2월 변용관 상위(중이와 대위 사이·판문점 경비장교)가 있다. 2007년 9월에도 북한군 병사 1명이 JSA로 귀순했다.

2008년 4월 경기도 파주 지역 비무장지대(DMZ) 내 우리군 최전방 경계초소(GP). 귀순을 위해 군사분계선(MDL)을 넘은 북한군 장교 이철호는 GP 100여m  앞에서 항복을 뜻하는 하얀 천을 흔들며 주의를 끌기 위해 권총 7발을 쐈다. 당시 GP장병들은 겁에 질려 대응 사격도 못하고 초소 속에 숨었다고 한다.

북한군 장교 이철호는 뒤따라올 지 모르는 북한군이 두려워 철책을 따라 약 500m 달렸다. 기다리다 지친 그는 풀숲에 2시간을 더 숨어 있었다. 하지만 우리측 GP 근무 장병들은 수색 시도는 커녕 상황 보고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이철호는 이후 GP까지 걸어가 “장병!” “장병!” 소리쳤다. 그때 GP 근무병 한 명이 그를 보더니 그냥 올라가 버렸고 부사관 한 명이 나와서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라고 물었다.

훗날 알려진 사실은 당시 GP에 근무하던 장병들은 상황을 그대로 보고할 경우 징계를 받을 것을 우려해 귀순 유도 작전을 펼친 것처럼 꾸며 상부에 보고했고, 표창까지 받았다.

2017년 11월 13일 JSA를 통해 귀순하는 북한병사.

2012년 10월 2일 동부전선 강원도 고성군 육군 22사단 지역 남측 최전방 철책을 타고 넘어온 북한군 병사는 합동참모부가 처음 공개한 것처럼 우리 군의 CC(폐쇄회로) TV에 발각된 게 아니라 전방 초소(GOP) 생활관(내무반) 문을 두드려 귀순 의사를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이른바 ‘노크 귀순’은 우리 군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합참 조사 결과 북한군 병사는 10월 2일 저녁 8시쯤 북측 철책과 전기 철조망을 통과했다. 이어 비무장 지대를 통과해 밤 10시 30분쯤 3~4m 높이의 우리측 철책을 넘어 왔으며, 불빛을 따라 GOP 생활관까지 온 것으로 알려졌다. 철책으로부터 내무반까지의 최단 거리는 약 10m였다.

GOP의 해당 부대는 합참에 허위 보고를 했다. 최고 지휘부에서부터 일선 경계부대까지 모두 거짓말을 하고 사실을 감춘 셈이다.

북한군 병사가 비무장지대 내 최전방 경계초소(GP)와 철책을 뚫고 GOP 생활관까지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도달했다는 것은 서울까지 무사히 들어왔다는 얘기와 같다.

유엔군 사령부가 11월 22일 공개한 13일의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북한군 귀순 상황은 한 편의 대탈주 영화 같았다. CCTV와 열상감시장비(TOD) 화면에는 간발의 차로 북한군 추격조를 따돌리고 전력 질주하는 장면(사진), 총상을 입고 쓰러진 귀순병을 우리 JSA 경비대대원들이 구출하는 상황 등이 고스란히 확인됐다.

1967년 JSA 탈출후 69년 북으로 가려다 잡힌 이수근.

판문점이 생긴 이래 영화 같은 탈출극이 몇 번 있었다. 군사정권위 본회의를 취재하러 나왔던 공산  측 기자가 탈출 월남한 사건이 두 번 있었다. 1959년 1월 27일 96차 본회의 때 소련「프라우다」 평양 주재 기자 이동준의 탈출과, 1967년 3월 22일 242차 본회의 때 북한 중앙통신 부사장이며 출입기자였던 이수근(당시 44세·사진)의 위장 탈출이 바로 그것이다.

이수근은 미국 통신사 UPI 기자 김용수에게 미리 탈출 의사를 밝히고 유엔군 측 막사로 살짝 들어와 미군 사병 복장으로 갈아입고 식사 운반 차량을 타고 판문점을 빠져 나왔다. 그래서 이 사건은 UPI가 독점 특종했다. 격투와 총격과 차단봉을 박차고 질주하는 차량 등 드라마틱한 요소가 많아 이 사건은 세계적 관심을 끌었다.

당시 귀띔으로 사건을 예감하고 있었던 동양방송(TBC) 기자 김집은 다른 기자들과 함께 판문점에서 철수하지 않고 기자실 구석의 전화 박스에 숨어 있다가 현장을 목격했다.
이수근은 스릴 넘치는 탈주극으로 깜짝 놀라게 만들더니, 1년 10개월 만에 다시 남한을 탈출해 세상을 또 한 번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1969년 1월 27일 이수근이 서울을 탈출했다. 감시요원이 잠시 철수한 틈을 타 가발과 콧수염으로 변장한 채 김포공항을 빠져나갔다. 우여곡절 끝에 1월 31일 캄보디아 프놈펜으로 향하던 비행기의 중간 기착지인 월남 사이공의 탄송누트 공항에서 체포되었다. 2월 14일 중앙정보부는 끈질긴 추격 끝에 북한으로 가려던 이수근을 체포했다고 발표했다. 이수근은 위장 귀순자이자 이중 간첩으로 발표되었다.

1967년 판문점 탈출때 사진을 다시 확인한 결과 북한 경비원들은 이수근이 탄 차를 향해 500여 발의 총을 쐈지만 정조준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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