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에도 내부 분열로 갈팡질팡뿐
생각 다른사람 끌어안는 대범 없어
‘금모으기’ 같은 단결 다시 못볼수도

노조는 이익 챙기기에 몰두 중이며
경제 쥐고 흔드는 정치 바뀌지 않고
촛불혁명, 달라진 건 여야 공수교대

 

김병길 주필

1998년 초 서울의 한 의과대학에서, 무료 약초교실을 개설했더니 100명 수용의 교실에 1,000명이나 모여들었다. 주로 ‘IMF 등산객’으로 불리는 40대 이상의 실직자와 주부들이었다. 옛날에는 나무꾼이나 붓짐, 소금장수 등 산을 넘어 다니는 이라면 약초를 식별해 산삼이나 복령같은 값진 약초를 캐어 횡재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심마니를 ‘개 심마니’라 했는데 그때는 ‘IMF 심마니’가 등장한 것이다.

대한제국의 모든 주권을 일제에 빼앗긴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일’ 다음으로 ‘제2의 국치일’이라면, 1997년 12월 3일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이 개시된 날이 꼽히고 있다. 이날로 대한민국 경제주권(통화, 재정)의 상당 부분을 상실했다.

최근 어느 여론조사에서는 1990년 대 말 외환위기(환란)를 6·25전쟁 다음으로 가장 충격적인 사건으로 꼽았다. 국가 부도를 막는 데 도움이 되겠다고 많은 국민이 장롱 속에 소중히 묻어두었던 금붙이까지 들고 나온 충격적인 사건이다.

하지만 우리는 2001년 8월 23일 195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전액 상환하면서 관리 체제에서 조기 졸업했다. 해외 언론과 전문가들은 이런 조기 졸업이 세계경제 역사상 유례가 없다며 감탄했다.

환란의 근본 원인은 크게 보면 당시 정부와 기업 그리고 금융기관 모두가 바깥세상 변화를 미리 내다보고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문제해결 능력이었다. 당시 제시됐던 과제들은 처음 나온게 아니었다. 1997년 훨씬 전부터 제기됐던 재벌 개혁, 노동 개혁 관련 기구들도 이미 있었다. 그러나 아무런 결론도, 실행도 없었다. 문제는 이견과 갈등을 조정하고 합의를 도출하는데 실패한 정치 때문이었다.

오죽했으면 외환위기와 금융위기 이후 가장 유행했던 용어가 ‘말만 있고 실행은 없다’는 뜻의 ‘NATO(No Action Talking Only)’였을까?

그렇다면 정확히 20년이 지난 지금, 당시 제기됐던 문제들은 모두 해결됐을까? 과연 지금 우리는 달라졌는가, 아니면 최소한 달라질 준비가 됐는가? 하지만 외환위기 당시엔 국민이 일치단결해 위기를 극복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사람이 더 많다. 이런게 진짜 위기다. 이런 상황인데도 우리는 내부 분열로 갈팡질팡하고 있다.

지금 우리는 작은 차이를 과장하고 이를 이유로 큰 싸움을 벌이고 있다. 생각이 다른 사람을 끌어안는 대범함이 사라졌다. 생각이 다른 사람끼리는 같이 이야기도 안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직무 집행과 관련해 헌법과 법률을 위반해 국민이 대통령에게 부여해 준 신임을 근본적으로 저버렸다.” 1년 전 12월 9일 박 전 대통령의 탄핵 소추안을 작성한 국회 소추위원단은 국회 본회의 제안 설명을 통해 밝혔다.  최순실이라는 사인(私人)이 국정 농단을 하도록 권력을 사유화 해 대의민주주의 헌법 정신을 위배했다는 요지였다.

국회의 탄핵소추안은 찬성 234, 반대 56, 기권 2, 무효 7표로 가결 정족수 200표를 훌쩍 넘어 통과됐다. 새로운 역사의 시작이었다. 분노한 시민들은 광장으로 몰려나와 촛불을 들었고, 결국 헌법에 따라 박 전 대통령을 파면하는 탄핵 철차를 궤도 위에 올려 놓았다.

탄핵이 불러 일으킨 가장 큰 변화는 정권 교체였다. 탄핵 민심을 등에 업고 더불어민주당은 집권 여당으로 탈바꿈했다. 지지율도 정권교체 이후로 50% 선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내실을 들여다보면 과연 이런 높은 지지를 받을 자격이 있는 지는 다소 의문이다.

여당의 행태를 보면 거수기도 이런 거수기가 없다. 특히 새정부는 인사 문제에 있어서 전형적인 ‘내로남불’을 답습하고 있다는 비판을 면치 못했다. 탄핵의 직격탄을 맞은 옛 새누리당은 분열된 뒤 집안 싸움으로 국정 운영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정치가 경제를 쥐고 흔드는 것도 크게 달라진 것 같지 않다. 권위주의 정권처럼 최저임금 근로시간 단축, 비정규직 정규직화 등으로 기업을 옥죄고 있다.

그런데도 낙관만 판친다. 이러다보니 위기 요소를 관리할 만한 정책은 안 보인다. 노조는 이익 챙기기에 몰두 중이다. 경영계는 움츠린 채 눈치만 살핀다. 노사정이 모두 따로 노는 셈이다.
질서 있는 집회로 법치주의에 따라 최고 권력자를 파면한 사례는 전례를 보기 어렵다는 점에서 명예혁명이었다. 하지만 20년전과 1년전 그리고 2017년 지금, 혁명의 끝에 달라진 것은 겨우 여야 공수 교대 뿐이라는 여론이 따갑다. 

이제는 눈을 과거에서 미래로, 안에서 밖으로 돌려야 할 때다. 정부는 더이상 갈등 증폭에 앞장서선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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