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빈자 똑같이 누리는 것이 시간
아픈 기억 시간따라 가버리니 다행
나이들면 여생 줄어 시간 더 빨리가
‘시간’ 재료로 살아온 올해 잘 살았나
2100년 쯤 ‘나이 거꾸로 먹기’도 가능

 

김병길 주필

‘늙다’라는 단어는 동사인가 형용사인가. 국립국어원은 최근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늙다’를 동사로 분류했다. ‘늙다’는 사물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늙다’는 ‘예쁘게 늙자’, ‘예쁘게 늙어라’와 같은 청유형과 명령형이 가능하다. 반면 형용사 ‘예쁘다’는 ‘예쁘자’, ‘예뻐라’로 변화시켜 사용할 수 없다. 그러니 ‘늙다’를 동사로 분류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그럼에도 ‘늙다’는 동사이고 ‘젊다’는 형용사라는 건 해명이 쉽지 않은 비대칭성이다.

‘세월이 참 빠르다’, ‘시간이 참 안가네’라는 때론 빠르게 때론 느리게 라는 것을 감안하면 ‘늙는다’는 것이 동사가 될 수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시간의 심리학’에 따르면 나이가 들수록, 상황에 몰입할수록 시간은 빨리 흐른다. 반면 새로운 경험과 환경에 놓이면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 나이 들수록 시간의 체감 속도가 상대적으로 빨라지는 것은 인생에서 1년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줄어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느끼는 일정 기간 시간의 길이는 인생 자체의 총길이에 따라 변한다. 10세 아이에게 1년은 살아온 삶의 10분의 1이고 50세에게는 50분의 1이다. 만약 태어난 지 1개월 밖에 안 된 아기라면 1주일은 무려 살아온 삶의 4분의 1에 해당된다. 그러니 1주일이 긴시간으로 느껴질 것이다.

하루의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다. 부자라고 해서 시간을 더 많이 쌓아둘 수 없다. 아무리 가난하더라도 쌀이 떨어지듯 시간이 바닥나 버리지는 않는다. 인간에게 시간이 바닥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그러니 시간만큼 소중한 것은 없다.

아무리 강렬했던 기억일지라도 시간이 흐르면 많은 것이 머리에서 희미해지고 눈앞에서 사라진다. 그래서 망각은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이라는 말도 있다. 때때로 사람들은 말한다. “모두 지나갈거야. 자고 나면 다 잊을 수 있을 거야.”

만일 사람이 지금까지 벌어진 슬프고 아팠던 경험을 하나도 빠짐없이 생생히 머릿 속에 새겨둔다면 과연 버텨낼 수 있을까. 아픈 기억은 시간과 함께 흘러가 버린다고 믿기 때문에 오늘을 담담하게 살아갈 수 있다.

1895년 웰스는 ‘타임머신’이라는 공상소설에서 다가올 시간이 세상을 어떻게 바꿔놓을지를 그렸다. 주인공은 시간을 여행한다. 시간의 틈새를 빠져나가서 아무도 알지 못하는 미래의 세계로 여행할 수 있는 기계를 발명했다.

그는 그 기계를 타고 몇십년 후로 날아간다. 그곳에서 만난 미래의 사람들은 아주 아름다울 뿐 아니라 하루 종일 놀기만 했다. 걱정이라고는 없는 사람들 같아 보였다. 하지만 비밀을 알고 보니 그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 있었다. 지하인간들이 간혹 그들을 잡아먹기 위해 습격했다.

미치오 카쿠가 쓴 또다른 SF 소설 ‘2100년의 어느 하루’에서 주인공의 나이는 71세. 신체 장기와 근육 상태는 30세. 아침이면 벽지 스크린에 낯익은 얼굴이 나타나 잠을 깨운다. 최근 구입한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가상의 인물이다. 세수를 하는 동안 거울·변기 등 욕실에 장치된 수백 개의 센서는 주인공 입김에서 뿜어져 나온 분자와 몸 속 혈액을 분석해 오늘의 컨디션을 체크해준다. 집안의 모든 가구와 가전제품은 머리에 부착된 센서를 통해 움직인다.

콘텐트 렌즈를 착용하면 화면에 인터넷 창이 뜬다. 도로 위에 떠다니는 자기부상 자동차를 타고 출근한다. 휴가 때는 탄소 나노 튜브로 만들어진 통로를 따라 우주 엘리베이터를 타고 여자친구(실제나이 61세, 외모 나이는 20대)와 여행을 떠난다.

황당무계한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빛의 속도로 변하고 있는 세상을 상상하면 불가능하지는 않다. 2100년쯤이면 ‘나이 거꾸로 먹기’가 꿈이 아닐 것이다. 

‘나는 너를 토닥거리고/너는 나를 토닥거린다./삶이 자꾸 아프다고 말하고/너는 자꾸 괜찮다고 말한다./바람이 불어도 괜찮다./혼자 있어도 괜찮다./너는 자꾸 토닥 거린다./나도 자꾸 토닥거린다./다 지나간다고 다 지나갈 거라고/토닥거리다가 잠든다.’(김재진의 시 ‘토닥토닥’)

하루하루가 소중했던 2017년이었다. 시간의 별칭 중에서 황혼(黃昏)이라면 세력이나 나이 따위가 한창인 때를 지나 쇠퇴하여 종말에 가까운 때를 비유하기도 한다. ‘시간’이라는 재료로 살아온 한 해가 저물었다. 나는 잘살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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