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길 주필

살인·나태·거짓·불의·배신·폭력·천륜
7개 지옥 상상 세계지만 ‘냉정한 현실’
‘착한 끝 있어도 악한 끝은 없다’ 메시지

나태·거짓에서 자유로운 사람 드물 것
‘전쟁 모면·안전’ 화두엔 ‘각자도생’ 뿐
대형 사고마다 책임 강조·눈물 지겨워 

 

‘살아 진천(生居鎭川) 죽어 용인(死居龍仁)’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나이도 같고 이름도 같은 진천 사람과 용인 사람이 한날 한시에 죽었다. 두 사람이 저승에 도착하니 저승사자가 용인 사람은 아직 죽을 때가 안 되었다면서 돌려 보냈다. 용인 사람이 다시 이승에 와보니 자기 시신은 이미 매장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진천으로 가보니 저승에서 만났던 진천 사람의 시신은 아직 그대로 있었다.

그래서 다짜고짜 진천 사람 몸에 혼령이 들어가 다시 살아났다. 하지만 그의 몸은 진천 사람인데 혼은 용인 사람이 됐다. 따라서 진천 가족들을 통 알아볼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다시 용인에 있는 옛집을 찾아갔으나 용인의 가족들 역시 몸이 바뀐 그를 몰라보고 식구 대접을 해주지 않았다. 자기 신세가 하도 기막히고 원통해 원님을 찾아가 그간의 사정을 말했다. 원님이 판결을 내렸다.

“자네는 분명 용인 사람인데 진천에서 다시 살아났으니 살아있을 때는 진천 사람으로 있고, 죽거든 용인 사람이 그 시체를 찾아가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살아 진천 죽어 용인’이란 이 이야기가 오늘날에는 풍수적인 뜻으로 잘못 쓰이고 있다. 살기에는 충청도 진천 땅이 제일이고, 죽어서 묻히기는 경기도 용인이 가장 좋은 땅이라고. 본래의 이야기와는 분명 다르니 풍수적으로 인용하는 일은 분명 잘못됐다.

2002년 에미상과 골든글로브상을 휩쓴 미국 TV 드라마 ‘식스 피트 언더(Six Feet Under)’는 죽음을 코믹하게 다룬 블랙 코미디다. LA에서 장의업(葬儀業)을 하는  한 가족 이야기인 이 드라마 제목은 땅속 6피트 깊이에 관을 묻는 장의 풍속을 말한다. 이들 가족은 죽은 사람들의 영혼으로부터 수시로 충고와 잔소리를 듣는다는 이색 설정이 시청자들에게 크게 어필했다.

죽음은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할 삶의 연속일까, 아니면 새로운 삶을 위해 반드시 풀고 넘어가야 할 매듭일까.

겨울철 극장가에 지옥 바람이 후끈하다. 영화 ‘신과 함께-죄와 벌’이 막장 없이도 세대 불문 공감을 얻어냈다. ‘신과 함께’는 사람이 죽으면 49일 동안 7개의 지옥을 통과하며 심판을 받는다는 한국적 사후관을 토대로 한 인기 웹툰이 원작이다. 영화는 여기에 가족주의 코드를 더했다. 소방관 자홍이 저승사자 강림 등의 인도로 사후 심판을 받는 과정에서 청각장애인 어머니 등 가족에 얽힌 슬픈 이야기가 드러난다.

살인·나태·거짓·불의·배신·폭력·천륜 7개 지옥에서 7번의 재판을 통과한 망자만이 환생할 수 있다. 살인·폭력은 둘째 치고 나태·거짓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드물 것이다. 게다가 전쟁 공포에 휩싸여 있는 최근 우리 주변이고 보니 영화와 시절인연이 예사롭지 않다.

조선시대 불화(佛畫) ‘시왕도(十王圖)’에는 저승에서 재판을 관장하는 왕 10명과 지옥에서 발버둥 치는 중생들이 등장한다. 영화 ‘신과 함께-’의 원조라고 할만하다.

영화 ‘신과 함께-’의 메시지는 단순명쾌하다. ‘착한 끝은 있어도 악한 끝은 없다.’ 어려서부터 어른들로부터 듣던 그 단골 멘트가 아니겠는가. 오래도록 살아남은 ‘권선징악’의 교훈이기도 하다. 흥행과는 별개로 단선적인 캐릭터, 신파라는 혹평도 만만찮다.

‘부재한 아버지, 병든 어머니, 가난한 살림’으로 요약되는 자홍네 형편은 진부하리만큼 낯익은 것이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 감성적 폭발력을 발휘하는 배경이 됐다. 여기에 더해 군 복무 중 의문사라는 또 다른 비극도 묵직하게 다뤄진다. 극 중 강림은 제대를 앞두고 억울하게 숨져 원귀가 된 병사로 동분서주한다. 

강림도령은 우리 신화 ‘차사본풀이’에 나오는 인물이다. 본래 저승이 아닌 이승의 사자였는데 강림도령이 저승에서 염라대왕을 붙잡아 오고 나중에 염라대왕이 강림도령을 저승에 데려가 사자로 삼는 내용이 ‘차사본풀이’에 자세히 다뤄진다. 여기에서 모티브를 따온 듯하다. 

신화에서도 저승사자는 항상 삼차사가 함께 다니고 해원맥·이덕춘 같은 영화에 쓰인 이름들도 신화에 가끔 나온다. 특히 충북 제천과 밀양 화재 등 잇단 참사를 겪으면서 소방관은 되어야, 화재 현장에서 목숨을 던져야, 저승의 7개 지옥을 어렵사리 통과할 수 있겠다는 것을 보여줬다. 저승사자들이 19년 만에 만나는 의인도 그럴진대, 보통 사람들로서는 언감생심이다.

 
염라대왕이 지배하는 지옥은 상상 속의 세계이지만 냉정한 현실에 기대어 있다. 영화 속에서 저승은 현재이고, 이승은 과거이다. 현실은 과거와 현재가 마구 뒤엉켜 있고, 환생을 바라는 미래 또한 그 현실 속에 한데 어우러져 있음을 일깨운다.

현실은 물 흐르듯 쭉 흘러가는 단선 구조가 아니다. 죽은 영혼을 안내하는(현실) 사자들은 이승의 세계(과거)를 오가면서 과거와 충돌하고 교류하면서 화해를 시도한다. 

우리가 부딪히는 세상은 새해 달력의 첫 장을 넘기는 것처럼 구분이 쉽지 않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나라의 현실 역시 이렇게 과거·현재·미래가 뒤섞여 있다.

이시각 우리들의 화두인 ‘안전(安全)’은 현재와 과거의 비중이 훨씬 크다. 바다를 잘 안다는 전문가들은 ‘가만히 있으라’면서 탈출했다. 아까운 생명을 구하지 못한 게 지난 2014년 세월호 참사였다. 국민의 머리에 사고가 나면 각자 도생 말고는 다른 생각을 할 공간이 사라졌다. 대형 화재나 사고가 발생하면 그때마다 대통령과 총리, 장관들이 현장을 찾아가 정부의 책임을 강조하고 눈물을 보이는 풍경도 이젠 지겹다. 국민의 마음을 얻으려는 선거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으로 끝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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