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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칼럼] 장미꽃 핀 겨울 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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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동우 한국언론진흥재단·작가
  • 승인 2018.02.01 22:30
  • 댓글 0

정지의 순간 마주하는 것 소중하고 값져
그 무엇을 놓는 순간 마음엔 평온 찾아와
한결같은 삶 속에서 멈춤의 시간 즐기자 

 

이동우 한국언론진흥재단·작가

시골집 담장 밑에 붉은 장미꽃 몇 송이가 아직도 남아있다. 지난해 뒤늦게 피어난 꽃잎들이 채 낙화되지 못하고 겨울을 맞은 모양이다. 메마른 가지 끝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지만 겨울의 한파 속에서도 붉은빛의 의연함만은 잃지 않고 있다. 장미의 꽃봉오리는 만개하지 못했다. 입술을 꼭 다문 듯 의연하게 꽃잎을 오므리고 있다. 그 모습이 결연해 보인다. 모진 추위를 견디고 이겨내며 아름다운 꿈을 꾸고 있는 장미의 굳은 의지가 느껴진다. 

겨울의 한가운데서 마주친 빛바랜 장미를 보며 여러 가지 단상에 젖는다. 매서운 한파를 맨살로 버텨내고 있는 붉은 꽃잎들을 보면서 생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생각한다. 장미는 마지막 순간까지 화려한 꽃잎을 피우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점점 메말라가는 대지를 뚫고 한 방울의 물을 찾기 위해 뿌리는 점점 더 깊은 땅속으로 뻗어 내려갔을 것이다. 줄기는 뿌리가 찾은 생명의 물을 온 힘을 다해 끌어올렸을 것이고 마침내 꽃눈은 뿌리와 줄기가 전해 준 한 방울의 물을 머금고 붉고 화려한 꽃송이를 피워냈다. 

꽃이 만개하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장미의 화려한 꿈이 좌절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음 생애로 이어지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메마른 대지에서 한 방울의 물을 찾던 뿌리의 치열함과 안간힘을 다해 물을 끌어올리던 줄기의 몸부림은 다음 생애를 준비하기 위한 몸짓이다. 뿌리와 줄기는 이 치열한 몸짓을 잊지 않고 기억한다. 아무리 매서운 한파가 몰아치고 세상의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는 추위가 찾아와도 결코 잊지 않는다. 기억마저 점점 희미해져 가는 동토의 땅에서 그 치열했던 몸짓만은 잊지 않는다. 잊지 않고 기억했다가 다시 여름이 오고, 화려한 계절이 돌아오면 다시 물을 찾고, 물을 끌어올려 한 송이 아름다운 장미를 피워낼 것이다. 

장미꽃 핀 담장이 있는 집에는 아버지가 홀로 살고 있다. 여름의 장미처럼 한때는 젊고 화려했던 아버지는 이제 겨울의 장미처럼 무기력하다. 매서운 겨울바람에 상처 입은 장미의 겉 꽃잎처럼 얼굴엔 주름이 깊고, 물기 없는 줄기처럼 피부는 탄력을 잃어가지만, 장미가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도 치열했던 몸부림을 기억한다. 그 치열했던 몸부림을 잊지 않으려고 늙은 몸으로 비닐하우스를 고치고, 말려 놓은 옥수수 알갱이를 따서 모으고, 눈이 내리면 새벽부터 일어나 눈을 치운다. 그렇게 아버지는 다음을 준비하고 있다. 자식들은 아버지의 치열했던 몸부림을 기억하고 봄이 오면 비닐하우스에 고추를 심고, 텃밭에 옥수수를 심을 것이다.

장미꽃 핀 담장이 있는 마을에는 노인들이 살고 있다. 대부분 팔순을 넘긴 나이이다. 젊은이 들은 오래전에 마을을 떠났다. 아이들의 울음소리는 끊긴지 오래이다. 노인들만 살고 있는 마을의 시간은 더디 흐른다. 노인들은 느린 발걸음으로 걷고 급할 것 없는 손짓으로 하루를 보낸다. 마을회관에 모여 옛이야기를 하고, 바둑돌 내기 화투를 치고, 함께 밥을 먹는다. 그들의 더딘 하루는 그렇게 지나간다. 그들의 하루도 장미의 치열한 몸짓을 닮았다.

느릿느릿 걸어가는 시골 노인들을 보면서 인생을 생각한다.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부여잡고 있지는 않은지, 의미 있다고 여겨지는 일들이 진정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인지 되돌아본다. 삶을 제대로 살고 나 있기는 한 것인지,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한다.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도 정작 미련과 집착을 버리지 못하고 아등바등 힘겹게 살아가는 세상살이가 야속하게 느껴진다.

장미꽃 핀 겨울 담장의 시간은 멈춰져 있다. 장미는 성장을 멈추었고, 맨드라미도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 담장을 타고 오르던 포도나무는 메말라 있다. 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던 잡초도 보이지 않는다. 담장에 기대어 있는 몽당빗자루도 녹슨 쇠스랑도 언제나 같은 모습이다. 마치 한 장의 사진 속 풍경처럼 변함이 없다. 움직임이 없는 멈춤의 상태, 언뜻 무료한 듯 보이는 그 모습에서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바쁘게 돌아가는 현대사회에서 멈춤의 순간을 마주한다는 것은 소중하고 값진 일이다. 멈춤과 마주하는 순간 마음에는 평온이 찾아온다. 어떤 생각이 나 잡념도 떠오르지 않는 무(無)의 상태이자 한없이 고요한 시간이다. 그 순간, 찌꺼기처럼 남아 있는 마음속의 온갖 갈등과 시기와 질투와 미움이 모두 사라지고 평화가 찾아온다. 어떤 동요도 없는 평온함이 온 마음에 가득하다. 겨울 담장에 피어난 장미가 가져다준 소중한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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