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번 지났지만 여러 번 지나갔지만 또 다시 생각 들고
이 어부들의 집들을 잊을 수 없네.
지난밤 비 내리고 처음으로 맑게 개이니
아침 일찍 일어나 서둘러 말 먹이를 주네.
문을 나서면 귀와 눈이 열려지고
보리밭의 푸른 물결은 온 천지에 넘실거리네.
뭇 산들은 제 각각 아름다운 빛깔을 다투고
아지랑이는 푸른 산 중턱에 걸려있네.
해 돋아나면 물가에서 밥을 먹는데
나란히 앉은 이들은 누구인지.
도끼 들고 깊은 산에 가서는
열 발이나 되는 큰 나무 베어오네.
관(官)의 명으로 전함(戰艦)을 만드니
저 서쪽 포구(浦口)의 아래에 있네.
아! 지친방어는 꼬리가 붉어지듯이
흉년에 홀아비 과부들 곤궁하겠네.
屢過亦有情 難忘此漁舍
宿雨喜初霽 晨起促秣馬
出門耳目曠 麥氣淸四野
諸山競秀色 餘靄翠半惹
日出水頭飯 列坐爾何者
持斧入深山 伐木大十把
官命作戰艦 于彼西浦下
嗟哉魴尾赬 凶歲困鰥寡
목장의 마필관리 국가 중대사
다른일에 부역 할 필요 없지만
병영 지시로 전함제조에 동원
겨울임에도 다양한 노역
흉년으로 인한 반복된 가난
얼마나 힘들고 황폐한지 짐작
위의 시는 ‘아침 일찍 고늘개(수영포)를 떠나며(早發水影浦)’로 고늘 지역에 사는 지역민들이 목장의 일과는 별도로 전함을 만드는 일에 동원되어 고생하는 지역민의 상황을 노래하고 있다. 그런데 ‘고늘개’는 지금의 동구 일산해수욕장의 북쪽 바다 쪽으로 돌출된 지역일대에 해당된다.
이 시의 배경이 된 1720년대 동구지역 사람들은 대부분 국영 목장의 목자들로 말과 관련된 다양한 일을 했다. 그런데 목장의 마필관리는 국가의 중대사임으로 다른 일에 부역을 할 필요가 없었다. 당시 목장에서 목자들의 주 업무는 아래와 같다.
▲목마(牧馬). 목자(牧子)가 매번에 6명씩 날마다 산에 올라가 보살피고, 10일에 교대한다.
▲목마가 물 마시는 30곳에 대하여 해마다 수리하고 판다.
▲목마가 눈과 비를 피하는 임시 가옥이 14곳인데, 모든 곳에는 청초(靑草) 20동(同) 곡초(穀草) 300속(束)을 해마다 쌓아 둔다.
▲목장이나 둔전을 경작하는 백성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많은 목장의 역(役)을 거행한다. 그러나 사목(事目)에 따라 읍역(邑役)은 모두 거론하지 않는다.
▲구마(驅馬)점열과 진상마를 착출(捉出)한다.
▲구종(驅從) 및 진상마를 붙들기와 겨울에는 콩죽을, 봄에는 꼴과 풀 먹이기, 빗질하기 등을 하고. 봉진마 붙들기와 기르고 보살피기를 한다.
▲원목자(元牧子) 394명은 날마다 목마를 돌보고 목장의 역을 일일이 봉행한다.
▲수포목자(收布牧子) 258명은 포를 거두어 상납한다.
이외에도 목자들은 둔전(屯田)과 위전에서 조와 콩을 상납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결전(結錢) 128냥 6전 7푼과 목자의 포전(布錢) 228냥 둔전의 모세(牟稅) 457냥 2전 등의 세금을 납부하였다.
당시 울산 목장이 있었던 지금의 동구 지역의 목자들은 인공저수지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외에도 『울산목장목지 1871』등 목장관련 옛 문헌을 보았을 때 말들이 눈과 비를 피할 수 있는 임시가옥 관리와 말들의 먹이인 곡초(穀草)를 마련하였다. 또한 마필 점열과 진상마를 위한 착출(捉出)과 진상마 붙들기 등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겨울에는 콩죽, 봄에는 꼴과 풀 먹이기, 말의 몸에 붙은 기생충을 제거하기 위한 빗질하기 등을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다양한 일을 하였기 때문에 보았을 때 당시 목장내의 목자들은 목장에 말을 방목하는 시기가 아닌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다양한 잡일을 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한편, 당시 이곳의 주민들은 너무 힘들고 다양한 목장 일과 더불어 울산병영의 지시로 새롭게 부여된 전함을 만드는 일에 또다시 동원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이것은 목자들은 목장과 관련된 일 외에는 동원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어긴 것이다. 하지만 절도사의 지시를 받아야하는 종 6품이라는 낮은 직책의 감목관의 입장에서는 그저 방관자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위의 시는 이러한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그들의 고통을 몸소 느끼며 지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위의 시를 내용으로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어 설명을 하면 아래와 같다.
먼저 전반부는‘여러 번 지났지만 또 다른 생각 들고 ~ 아지랑이는 푸른 산 중턱에 걸려있네.’까지이다. 여기서는 당시 그는 이곳을 여러 번 지나게 되었던 사실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때마다 반복되는 일상은 아침 일찍 일어나 말에게 풀을 먹이는 목자들의 모습과 힘겹게 살아가는 어민들의 어려운 생활을 바라보며 느낀 연민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후반부는‘해 돋아나면 물가에서 밥을 먹는데 ~ 흉년에 홀아비 과부들 곤궁하겠네.’까지이다. 여기에서 앞의 두 구절은 그들의 생활의 모습을 현실 생활인이 아닌 객관적인 입장에서 담담하게 그들 생활의 일면을 그리고 있다. 그의 표현에 의하면 해 돋아나는 아침 일찍 물가에서 밥을 먹고 있는 이들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도끼 들고 산에 가서 열 발이나 되는 나무를 찍어 내려온다고 했다. 이것을 통하여 당시 그들의 일상이 얼마나 힘든 나날이었는지를 간접적으로 느끼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두 구절은‘관(官)의 명으로 전함(戰艦)을 만드니 ~ 흉년에 홀아비 과부들 곤궁하겠네.’까지이다. 여기서는 그들이 왜 그토록 다급하게 밥을 먹고 산에 가서 나무를 해야 하는지, 또한 이러한 생활로 그들의 삶이 얼마나 황폐하고 힘들었는지를 알 수가 있다.
그들은 비변사의 명령으로 전쟁을 대비하기 위한 전함을 만들어야 했는데, 이것은 매우 위중한 사안이었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그리고 장비도 없이 열 발름이나 되는 나무를 베고 옮기는 일은 매우 위험하며 또한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일을 감당하고 있는 당시 그들은 설상가상으로 흉년이 들었다고 한다.
이러한 흉년은 이상 기후 탓일 수도 있지만 목장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각종 목장일과 하지 않아도 될 전함을 만드는 일까지 강제로 동원되어 농사일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이유로 흉년이 되었을 것이다. 어찌되었던 다음해까지 기근을 면하기도 어려운 상황이 되어 결국은 반복적인 가난을 불러 올 것이기에 앞으로 그들의 삶이 얼마나 더 힘들고 어려워 질 것인지를 짐작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