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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목관 홍세태가 남긴 조선 후기 울산의 생활·문화 (3)지친 방어는 꼬리가 붉어지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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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정한(李丁漢) 울산 현대고 교사·동구문화원 지역
  • 승인 2018.03.07 22:30
  • 댓글 0
이정한(李丁漢) 울산 현대고 교사·동구문화원 지역





여러 번 지났지만 여러 번 지나갔지만 또 다시 생각 들고
이 어부들의 집들을 잊을 수 없네.
지난밤 비 내리고 처음으로 맑게 개이니
아침 일찍 일어나 서둘러 말 먹이를 주네.
문을 나서면 귀와 눈이 열려지고
보리밭의 푸른 물결은 온 천지에 넘실거리네.
뭇 산들은 제 각각 아름다운 빛깔을 다투고
아지랑이는 푸른 산 중턱에 걸려있네.
해 돋아나면 물가에서 밥을 먹는데
나란히 앉은 이들은 누구인지.
도끼 들고 깊은 산에 가서는
열 발이나 되는 큰 나무 베어오네.
관(官)의 명으로 전함(戰艦)을 만드니
저 서쪽 포구(浦口)의 아래에 있네.
아! 지친방어는 꼬리가 붉어지듯이
흉년에 홀아비 과부들 곤궁하겠네.

屢過亦有情  難忘此漁舍
宿雨喜初霽  晨起促秣馬
出門耳目曠  麥氣淸四野
諸山競秀色  餘靄翠半惹
日出水頭飯  列坐爾何者
持斧入深山  伐木大十把
官命作戰艦  于彼西浦下
嗟哉魴尾赬  凶歲困鰥寡

 

홍세태의 초상.

위의 ‘아! 방어미정이로다. 흉년에 홀아비 과부들 곤궁하겠네.’에서 ‘아! 방어미정이로다’는 《시경(詩經)》 〈대아. 주남(大雅.周南)〉편의 ‘여수 방죽(汝墳)’의 전쟁터에 나갔다 돌아 온 남편을 반기는 여인(女人)의 시(詩)를 인용한 것이다.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저 여수 방죽을 따라 잔 나뭇가지 자르면서도 
당신을 뵙지 못하니 주린 아침 음식 찾듯 그리웠네.

저 여수 방죽을 따라 움 돋은 나뭇가지 자르면서도
당신을 만나게 되었으니 나를 버리진 않으셨네.
방어 꼬리는 붉어지고 왕실은 타는 듯한데
부모님이 계시니 다시는 안 가겠지

遵彼汝墳 伐基條枚
未見君子 惄如調飢
遵彼汝墳 伐其條肄
旣見君子 不我遐棄
魴魚赬尾 王室如燬
雖則如燬 父母孔邇

 

위의 시는 여수(汝水)가에 살고 있는 여인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녀의 남편은 전쟁터에 나갔다. 그녀는 손수 땔나무를 하는 고역을 하면서도 남편이 아무 탈 없이 하루 속히 돌아오기만 바랐다. 그러던 끝에 그녀의 간절한 정성 덕분인지 남편은 별 탈 없이 돌아왔다. 
 

일산진 마을 1970년. 동구청 제공



하지만 고생을 하면 방어의 꼬리가 붉어진다는 말이 있듯이 그녀의 남편은 꼬리가 붉게 변한 방어처럼 피곤에 절어 돌아 왔다. 하지만 여전히 나라는 안정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임으로 그녀는 나라가 아무리 어지러워도 부모님이 계시니 다시는 집을 떠나지는 말라며 애원하고 있는 것을 노래한 것이다. 

당시 중국은 주(周)가 멸(滅)하고 BC 221 진(秦)이 중국을 천하 통일하기까지 춘추전국시대(BC 401-221)라는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그러므로 위의 시는 어버이를 구실 삼아 다시는 자기 곁을 떠나지 말라는 당부와 기대의 마음이 깃든 시이다. 

한편, 홍세태 시의 배경이 되고 있는 당시 울산의 동구‘고늘개’ 즉 ‘일산리’는 1849년 「동면호적대장」의 자료를 분석해 보면 과부와 홀아비의 비율이 목장 전체에서 가장 높았다. 일산리 전체 31호 중에서 과부 홀아비의 비율이 19호로 일산동 전체 호수의 61.2%나 되었다. 

또한, 그들의 평균 나이도 과부의 경우는 38세, 홀아비는 45.9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함을 만드는 일에까지 동원되었으므로 그들의 삶은 더욱 어려웠다. 이것은 계속된 전쟁으로 피폐한 삶을 살았던 시기인 춘추전국시대와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원래 목장지역의 목자들은 목장의 일 외에 다른 일에 동원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방어진 목장에서도 가장 어려운 형편의 일산동의 목자들은 전함 만드는 일에 동원되어 감목관 입장에서는 매우 불쾌했을 것이다. 

울산부 지도(1745~1767년으로 추정). 당시 울산에서는 온산 부근의 봉산(封山)에서 전함 건조에 필요한 재목(材木)을 구하여 수군에 필요한 전함을 만들었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그리고 위의 시에 의하면 관의 명령으로 전함을 만들었는데, 만든 장소는 “저 서쪽 포구(浦口)의 아래에 있네”라고 했다. 아마도 위의 표현으로 보아 ‘성암동 선소’에서 배를 만들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시대 울산의 조선소는 임진왜란 전에는 학성공원 앞에 있었으나 당시에는 성암동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위에서 소개한 그의 시는 이러한 그의 감정과 지역민에 대한 연민을 노래한 것으로 어지러운 전쟁의 상황에서 만들어진 ‘방어미정’이라는 고사를 인용하여 당시 지역민의 어려움을 효과적으로 잘 노래한 것이다. 

원래 목장에는 암말 100필에 수말 15필로 구성된 1군(群)은 책임자인 군두(群頭) 1명, 군부(群副) 2명, 목자(牧子) 4명이 배치하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었다. 즉, 모두 7명의 정식 목자와 이들 목자를 보필하는 목자보를 각각 2명씩 배치해야 했기 때문에 1군(群)에 모두 21명의 목자를 배치해야 한다.

法典有曰牧場牝馬百牡十五爲一群每一群定群頭一人每年息八十五匹以上加階特異者加階授職
법전에 이르기를 목장의 암말 100필과 수말 15필을 1군(群)이라 하며 각 1군(群)에는 군두 1일을 두었는데 매년 85필 이상의 번식이 있으면 특별히 가자를 하였다.

그런데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당시 1720년 무렵 울산 목장의 경우는 마필이 17군[약 2,000마리]이기 때문에 모두 357명의 목자가 있어야 했다. 그러나 당시 울산목장에는 299명의 목자가 있어서 58명 정도가 부족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임에도 울산 목장 소속의 두 목장의 목자 78명 즉, 북목(호미곶) 장기 목장소속의 28명의 목자보와 남목(지금의 동구)방어진 목장소속의 목자보 50명은 속오군에 편성되어 있었다. 

원래 국가에서는 마정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목자의 자식들도 군역에 파정하지 못하며 가목자(목자보)도 속오군에 파정할 수 없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런데 목장의 목자보는 일 년에 반 필의 포를 바치는 일과 말의 꼴을 준비하고 목책을 설치하는 등 말을 기르는 다양한 일들을 해야 했다. 그중에서도 바닷가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전복, 해삼 등의 진상품도 마련해야 했기 때문에 더욱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므로 당시 방어진 목장의 목장보 중에서 일산리를 포함한 50명의 목장보는 속오군에 편성되어 있어서 전함건조에도 동원되어 3중 4중의 부담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을 관리하는 낮은 직급의 감목관 입장에서는 그들의 어려움을 알지만 그것을 해결할 방법도 없어서 매우 안타깝게 지켜 볼 수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그런데 그가 울산 감목관의 임기를 마친 3년 후인 경종 4년(1724)의 역사기록을 살펴보면 목장을 총괄하는 부서인 사복시의 간절한 소청에 의하여 국왕의 명으로 비변사의 명을 거두게 되는 기록이 있다. 아마도 이 무렵이 되어 방어진 목장소속 목장보 50명은 속오군에서 벗어나 전함 건조에 동원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홍세태가 지은 목장거주민의 삶의 어려움을 노래한 시가 당시 한양에 알려지면서 여론을 형성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는 목장내의 어려운 민원을 해결하게 된 것은 아닐까 여겨진다. 어찌되었던 걸출한 그의 시가 지역의 가장 어려운 민원을 해결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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