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일찍 일어나 새소리 듣다가
지나는 마을사람 사연 듣게 돼
몸도 쇠약하고 그들 아픔도 이해
졸다가 처마 밑에서 점심 맞이
쟁반에 나물 올려진 것 보고
입춘이라며 매우 기뻐해
겨울이 가면 다시 봄이 오듯
흘러가는 세월 속 새 희망 발견

이 늙은이 살다보니 어느 듯 일흔인데
형편없는 몰골 듬성한 머리털에도 정신은 새롭네.
천리나 머나 먼 길 서울 떠나 이별하여
취한 후 깨어보니 세상은 봄이네.
바닷가 숲에선 새들 지저귐만 들려오고
산촌 마을 사람들 한(恨)이 많아도 글짓는 사람은 적네.
처마 밑 졸음 깨어 밝은 해 맞이했더니
쟁반 오른 봄나물에 눈이 문득 새롭네.

此老居然近七旬 形羸髮短尙精神 
別來京國今千里 醉後乾坤又一春 
海樹只聞多恠鳥  峽村堪恨少詞人
晴簷睡起迎初旭 細菜登盤眼忽新
 

위의 시는 감목관으로 부임한 마지막 해인 그의 나이 70세인 경자년(1720년) 입춘에 쓴 글이다. 

이정한(李丁漢) 울산 현대고 교사·동구문화원 지역

고향을 떠나 먼 타향에서 입춘을 맞이하며 느끼는 그의 외로움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잘 드러나 있다. 또한 겨울이 가면 다시 봄이 오듯이 그렇게 흘러가는 세월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고자 하는 그의 마음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얼음과 눈 녹으면 만물이 다시 살아나 바다와 산 앞에 한 가족으로 만난다는 그의 말에 잘 나타나 있다. 이것을 통하여 보았을 때 자연물을 한 인격체로 인식하는 자연친화적인 그의 사상을 읽을 수 있다. 

홍세태의 초상.

하지만, 일흔의 나이에 낮은 벼슬살이에 그에게 들리는 것이라고는 새들의 지저귐 같은 산촌 사람들의 한 많은 말만 들리고 있다. 당시 그는 자신의 마지막 혈육이었던 막내딸마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그 해에 자신의 두 동생마저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나버렸다. 이제 남은 사람이라고는 외손자인 동손 밖에 없었다. 이렇게 고독한 상황에서 이들의 한많은 소리는 그냥 단순하게 들리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아침 일찍 일어나 새소리를 듣다가 지나가며 흘리는 마을 사람들의 한많은 사연을 듣게 된다. 몸도 쇠약하고 그들의 아픔도 이해가 되어 눈을 감고 처마 밑에서 졸다가 보니 점심이 된 것이다. 그런데 입춘이라며 쟁반에 나물이 올려 진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고 있는 것이다.

 입춘은 24절기 중에서 첫째 절기로 대한(大寒)과 우수(雨水) 사이에 있는 절기로 보통 양력 2월 4일경에 해당한다. 이날은 입춘축(立春祝)을 하고 지방에 따라서는 입춘굿(立春-)이나 보리 뿌리점[보리 뿌리를 보아 풍년과 흉년을 점치는 것] 등 특색이 있는 세시풍속이 있었다. 그리고 세생채(細生菜)라는 절기 음식을 먹었다. 

 세생채(細生菜)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입춘이 되면 당시 서울 인근의 고을에서는 총아· 산개· 신감채 등 햇나물 눈 밑에서 캐어 진상하였고 궁중에서는 이것으로 오신반(다섯 가지의 자극성이 있는 나물로 만든 음식)을 장만하여 수라상에 올렸다고 한다. 오신반은 겨자와 함께 무치는 생채 요리로 엄동(嚴冬)을 지내는 동안 결핍되었던 신선한 채소의 맛을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본떠 민간에서는 입춘날 눈 밑에 돋아난 햇나물을 뜯어다가 무쳐서 입춘 절식으로 먹는 풍속이 생겨났는데, 춘일 춘반(春盤)의 ‘세생채’라 하여 파·겨자·당귀의 어린 싹으로 입춘채(立春菜)를 만들어 이웃 간에 나눠먹는 풍속도 있었다. 당시 울산의 동구에서도 입춘일에는 세생채(細生菜)의 절기 음식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입춘축 : 입춘이 되면 글 내용에 따라 대문이나 큰방 문 위, 마루 양쪽 기둥 등에 글을 붙이는 것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 또는 ‘국태민안 가급인족(國泰民安 家給人足)’ 등의 글이 있었다.

 

눈 그친 낭떠러지 낙숫물 흘러 지절대고
실버들 한들한들 그림자 마다 새싹이 돋아나네.
검은 소 풀을 뜯고 양지 바른 언덕 따뜻해지니
넓고 넓은 저 봄밭을 갈고도 싶어지네.

雪盡千崖細澗鳴 遊絲弄水草芽生 
烏犍飽臥陽坡暖 十畆春田意欲耕
 

위의 시는 ‘이른 봄 시골의 흥취(早春郊興)’이다. 눈 그친 낭떠러지에는 낙숫물이 흘러 지절대며 개골로 흘러가고 실버들이 그림자마다 새싹 돋아나는 이른 봄날이다. 이렇게 봄이 되었지만 아직 새싹은 이제 겨우 돋아나려 하는데 양지바른 곳에는 제법 새싹이 돋아 있기도 하다. 이 시기에 농부들은 비로소 밭을 일구어서 씨앗을 뿌릴 준비를 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논갈이는 2월부터 시작된다. 이월의 첫 소날[丑日]에 첫 논갈이를 시작하는 날이라 하여 특정한 상징적 행위들을 벌인다. 이날 소의 뿔 사이에 나무칼을 묶고 붉은 종이꽃[紙花]을 달아준 다음에 이 소를 몰고 논으로 간다. 이렇게 하면 일 년 내내 질병이 소에 침범하지 못한다는 속신이 있다.

 논갈이는 논에 물을 잡고 하는 무논갈이와 논물 없이 하는 마른논갈이로 나뉜다. 무논갈이는 물 사정이 좋은 곳에서 하는 것으로, 겨울부터 논물을 받아놓았다가 갈이를 하는 것을 말한다. 반면에 마른논갈이는 물 사정이 나쁜 지역에서 논물을 잡지 않고 갈이를 하는 것을 말한다. 갈이의 횟수는 물과 토질 그리고 갈이용 소의 상태와 농민의 근면도에 따라 차이는 있었지만, 대개 3~4회에 걸쳐 행해졌다. 

 쟁기를 이용해 마른논에서 세 번 갈이를 하는 경우에 초벌갈이는 두둑을 짓듯이 성글게 간다. 이것을 ‘초바닥 갈이’ 또는 ‘초분종’이라고도 한다. 두벌갈이는 초벌 때 만들어 놓았던 두둑을 쪼개듯이 간다. 초벌갈이와 두벌갈이의 성격은 보통 ‘생땅 뒤엎기’라 표현하는데, 이것은 겨우내 묵혀두거나 보리를 심었던 논에 처음으로 쟁기질을 하기 때문이다. 세벌갈이는 무논은 물론 마른논갈이에서도 논물을 가둬놓은 상태에서 한다.

 논갈이 작업은 흔히 쟁기질을 의미할 만큼 논갈이 작업에서 쟁기는 가장 중요한 갈이도구로 이용되어 왔다. 농경 작업에서 쟁기를 이용한 우경(牛耕)은 농업생산력의 급격한 증대를 가져온 아주 중대한 농업기술의 혁신이었다. 

 소를 농경 작업에 이용할 때에 가장 핵심적인 일은 단위시간당 가장 많은 노동력이 소요되는 논과 밭의 갈이작업이다. 갈이란 일정한 깊이로 땅을 파서 뒤집어엎음으로써 표층의 흙과 심층의 흙을 서로 반전시키는 것이다. 소가 아무리 힘이 세고 길이 들었다 하더라도 아무런 농기구 없이 소의 힘만으로 갈이를 할 수는 없고 쟁기를 사용한다. 

 산비탈에 있거나 땅이 좁거나 배수가 나빠 쟁기질을 하기 힘든 곳에서는 쇠스랑이나 가래괭이를 써서 갈이를 하는 경우도 볼 수 있다. 위의 시는 이런 봄날의 정취를 시적으로 잘 묘사하고 있다. 

 과거에는 농가마다 토종소라 불리는 암소 한 마리씩은 키웠다. 그것은 농사철에는 논밭을 갈고 농한기에는 교미를 시켜서 새끼를 생산하면 팔아서 농가의 부업으로 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토종소라고 불리는 이런 소는 대부분 누른 소이다. 

 그런데 위의 시에서는 ‘검은 소가 풀을 뜯고 양지 바른 언덕 따뜻해진다’ 라며 검은 소를 언급하고 있다. 위에서 말하는 검은 소는 정지용의 ‘향수’라는 시에 나오는 얼룩배기 소를 말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갈색에 짙은 검은 줄무늬가 호랑이를 닮았다고 해서 ‘호랑이소’라고도 불리며, ‘칡 소’라고도 하는데 우리나라의 토종소 가운데 하나이다. 

 이 칡 소는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이는데 첫째는 평소에는 순하지만 신경이 예민해서 화가 나면 황소보다 훨씬 큰 몸집으로 달려들어 무섭고 사나운 소로 알려져 있다. 그런가하면 산짐승을 물리치고 주인을 구했다는 의리의 소로 불리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논어에  “칡 소가 낳은 송아지가 털이 붉고 뿔이 좋으면 제물로 쓰지 않으려 해도 신(神)이 그 송아지를 내버려두겠는가?” 라는 말이 있다. 이는 신분제도가 뚜렷했던 고대 동양사회에 쓸 만한 인재를 등용할 때 자주 인용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나라에서는 종묘 동향대제를 거행할 때 ‘검은 소’를 희생(犧牲)으로 하였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게 여겼으며 조선시대에는 8만여 마리 정도가 있었다. 그러나 1938년 일제가 한우 심사표준을 만들면서 ‘한우의 모색은 적갈색으로 한다’로 털색을 규정하면서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고 한다. 

한편, ‘칡소’는 지난 1995년부터 혈통복원사업이 시작되어 전국 농가에서 보급되면서 지금은 1,000여 마리가 사육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멸종위기 종에 포함된다. 위의 시를 통하여 보았을 때 당시 울산의 방어진에서는 칡소를 사육하는 농가가 있었던 것으로 보여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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