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물의 상처 예술로 승화시킨 자코메티
그의 모든 작품은 존재의 본질에서 시작돼
우리의 끝 알수 없지만 한발 한발 내디뎌보자

 

 

김감우 시인

주말에 태화강변을 걸었다. 밀린 일을 뒤로하고 강가로 달려 나간 것은 “사월이 잘 익어간다”라는 메시지를 받고나서였다. 순간, 그 문장이 그려내는 자연의 질서가 얼마나 황홀했는지 모른다. 그때까지 겨울 속에 웅크린 채 풀리지 않는 일에 매달려있던 필자에게 비수같이 아프고 명쾌하게 꽂혀들었다.

강변에 들어서자 온몸으로 더운 태양이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 바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며칠간 몹시 아프고 혼란스러운 것들이 조금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인간에게 걷는다는 것 만한 축복이 또 있을까? 걸어야 한다는 것보다 더한 고독이 있을까?

“마침내 나는 일어섰다. 그리고 한 발 내디뎌 걷는다. 어디로 가야하는지 그리고 그 끝이 어딘지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걷는다. 그렇다, 나는 걸어야 한다.” 스위스 화가이자 조각가 자코메티의 걸어가는 사람에 대한 이 말을 대할 때마다 가슴에 썰물이 지나가며 아득해진다. 필자는 얼마 전 막 내린 ‘알베르토 자코메티 한국특별전’에 다녀왔다. 이번 전시엔 회화, 조각, 드로잉 등 116점이 있었는데 ‘걸어가는 사람’은 전시 마지막 순서에 있었다. 검은 암막커튼으로 휘두른 공간은 묵상의 방이란 부제를 달고 있었다. 빛이 차단돼서인지 조각은 더욱 앙상해 보이는 긴 다리로 또 한 발짝을 내딛고 있었다. 앙상한 다리에 비해 두 발은 두툼하고 묵직해 보였다. 앞발에 몸의 무게가 반쯤 옮겨진 채 발꿈치 각을 꺾고 있는 뒷발이 그려내는 동적인 방향성은 걷는다는 것의 숙명 같은 것이 느껴졌다. 

바닥에 비치된 방석에 고요히 앉아 있는 관람객들이 더러 보였다. 그들은 말없이 자코메티가 꺼내준 고독을 내면 깊숙이에서 만나고 있는 듯했다. 전시회 주최 측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전시를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다”고 말할 정도로 중복관람 비율이 높았다고 한다. 앙상하기 짝이 없는 조각들, 미끈한 아름다움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그 작품들에게서 무엇에 그리 전율했을까? 

필자는 그 답을  자코메티 마지막 작품인 ‘로타르 반신상’의 눈빛에서 찾고 싶다. 자코메티는 사람의 시선에 생명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인체의 겉치레, 표정, 동작, 살점까지도 철저히 들어내 버리고 시선만 살아있게 했다. “내가 만들고 이뤘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란 말과 “예술은 흥미롭지만 진실은 훨씬 더 흥미롭다”란 말은 그의 창작정신을 잘 나타낸다. 

자코메티는 ‘로타르 반신상’ 진흙작품을 젖은 천에 싸 두고 검진차 병원에 가서 다시 작업실로 돌아오지 못하고 삶을 마감했다. 그 작품은 동생 디에고 노력으로 무사히 지켜졌다고 한다. 감동적이었다. 디에고는 자코메티 작품의 첫 모델이자 헌신적인 조수였고 죽을 때까지 충실한 모델이었다. 그리고 신인상주의 화가였던 그의 아버지 지오반니 자코메티의 말도 가슴에 와 닿았다. “내가 네 나이 땐  해가 떨어지면 견딜 수가 없었단다. 치열함과 창조의 꿈으로 가득 찬 예술적 분위기 속에서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 넌 운이 좋아 기회가 생겼으니 그 기회를 놓치지 말려무나” 부모의 마음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언제나 이렇게 달려와 안기는 것인가. 

걷어내고 또 걷어내어 존재의 본질을 표현하고자 했던 자코메티는 시 한 수 써 놓고 사족을 쉬 잘라내지 못하는 필자를 가르친다. 그의 조각상에 나타난 형형한 눈빛으로 필자를 꾸짖는다. 그의 작품 걸어가는 사람은 오늘도 어느 낯선 곳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는가. 전시회를 찾았던 많은 관람객들 또한 왼발과 오른 발에 무게를 옮겨가며 오늘 하루를 잘 걸어가고 있는가. 

시인 장주네는 그의 책 「자코메티의 아뜰리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보기에 자코메티의 예술은 모든 존재와 사물의 비밀스런 상처를 찾아내어, 그 상처가 그들을 비추어 주게끔 하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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