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야부인은 싯다르타를 낳고 이레째 되는 날 산욕열(産褥熱)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싯다르타는 히말라야 남쪽 기슭, 지금의 네팔 타라이 지방의 작은 왕국 ‘카필라’의 왕자로 태어났다. 어머니를 여윈 후 우울한 청년기를 보냈고 출가 후 고행 끝에 큰 깨달음을 얻었다. 마야부인의 사망원인인 산욕열은 태반 박리, 출산 상처에 세균 침입 때문이지만 19세기 중반까지 원인이 규명되지 않았다.

기원전 54년 로마에서 카이사르의 딸 율리아가 출산 중 목숨을 잃었다. 이후 율리아의 남편 폼페이우스는 나날이 장인과 대립각을 세웠고 5년 후 내전에 돌입한다. 카이사르는 ‘주사위는 던져졌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승리, 공화정을 혁신한다. 남편과 금실 좋던 율리아가 일찍 죽지 않았더라면 로마 역사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35세에 깨달음을 이룬 싯다르타는 이후 45년간 인도 북부의 각지를 돌며 깨달음의 이치를 전파했다. 그 와중에 숱한 일들이 있었다. 조국 카필라 왕국이 이웃나라에 의해 멸망했다. 양어머니였던 이모 마하파자파티를 비롯해 부인과 아들이 머리를 깎고 출가했다.

싯다르타의 설법은 더 많은 인도인의 가슴을 뚫어주었다. “생겨난 모든 것은 소멸하게 마련”이라고 말한 그의 육신도 그랬다. 80세가 됐을 때 대접받은 버섯(혹은 돼지고기) 요리를 먹고서 식중독에 걸려 위독한 상태가 됐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싯다르타는 오히려 식사를 대접한 제자 춘다를 걱정했다. 이대로 목숨을 거두면 사람들이 “춘다 때문에 붓다가 죽었다”며 원망할 것을 우려해서였다. 

부처님 오신날을 축하하는 사월 초파일(5월 22일)은 아홉마리의 용이 아기 부처님을 목욕시킨 날이라 하여 욕불일(浴佛日)이라고도 했다. 원래는 불가(佛家)의 축의행사였으나 불교가 민중 생활 속으로 전파됨에 따라 사월 초파일은 민속화되기에 이르렀다.

어머니를 여윈 싯다르타는 29세에 출가, 6년 고행을 하고서 35세에 깨달음을 이루었다. 만약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전 소독약이 개발돼 산욕열을 치료할 수 있었다면 싯다르타는 출가하지 않았을 수도, 불교와 부처님도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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