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0년대 초 방어진 울기등대 입구.
▲ 처음 구입했던 포니.
▲ 공영화학 근무 당시 모습들.
▲ 동료들과 함께한 목도 나들이. 왼쪽 상단에 한국비료 컨베이어벨트가 보인다.
▲ 정병태 구술자가 이야기하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 구술로 그려 낸 기억 속의 울산 (9) 1938년생 정병태 씨

“정병태는 1938년 일본 동경에서 태어났다. 해방 전 부모님과 함께 귀국했다. 전쟁 통에 어렵게 공부했고, 22세에 대학에 진학했다. 1967년 공영화학에 취업하게 되면서 울산에 왔다. 1977년 고려아연 공장이 건설될 때 고려아연으로 옮겨 17년 근속하고 퇴직했다. 이후 약국을 경영하는 아내의 일을 도우며 생활하고 있다. 울산으로 온 뒤 중구 교동·성남동에서 주로 생활했다.”

◆ 대학원 들어갔는데 돈이 없어서 못 댕겼어.

65년에 대학을 졸업했어요. 65년 2월 달에 졸업하고, 영국계 회사에 취업했어요. 은행에 전산 하는 건데, 최초로 한 거야. 그때 기업은행에서 그걸 쓰기 시작을 했지. 내가 하는 업무는 주로 판매하고, AS 하고. 거기에 오래 안 있었어요. 그 회사에 1년 댕기다가 그다음에 대학원에 들어갔거든. 대학원에 들어갔는데 대학원도 1학년 거의 못 마쳤어요. 돈이 없어서 못 댕겼어. 우리 시절만 해도 일반 직장에 취직 못 하면 공무원 갔어요. 내가 제일 처음에 졸업해가지고 월급을 받으니까, 7,500 원이야. 공무원 월급은 4,200 원이야. 거의 절반이지. 지금같이 공무원들이 어깨 펴고 나오는 것도 없었어요. 취직하다가 안 되면 공무원 가고 그랬어. 공무원은 그때만 해도 취직이 참 잘 됐어요.

◆ 공영화학 공장 건설 작업부터 했어요.

일본 재일교포가 했는데, 그 때만 해도 다른 회사보다 잘해줬어요. 1967년 3월 달에 왔어. 나는 3월 달에 내려오고, 아내는 5월 말 정도 돼서 왔지.

건설할 때 왔으니까, 우리가 와서 공장을 세웠지. 일본인들이 와가지고 재료도 가지고 오고, 공장 건설을 위한 재료도 가지고 오고, 기술자도 와서 작업하면, 우리는 보고 배우면서 했지. 일본에 연수도 갔었지. 그때 우리나라하고 일본이 참 너무 차이가 많이 날 때지. 일본 사람들이 원료를 싣고 부두에 와서 미깡(감귤)을 먹더라고. 귤을 먹는데 보니까, 진짜 완전히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들같이 느껴지더라고.

◆ 처음에 울산에 혼자 왔어요. 기숙사에서 생활했지.

처음에 가족이 울산으로 오기 전까지는 공장 안에 기숙사가 있어서, 기숙사에서 생활했고, 가족이 오고 나서는 양사초등학교 뒤에서 생활했어요. 그때 월세 2,000원인가! 그때 기억나는 건 시내에 은행이 없었어. 여천동 지금 자동차 검사소 그 근처에 한일은행 하나 있었어. 그게 기억이 나.

◆ 가족이 오기 전에 일 끝나고 심심하니까, 걸어서 시내 놀러 가요.

뭘 먹었는지 별로 생각이 안 나요. 두루치기는 없었어요. 저기 중앙 시장가면 2층에 막걸리 집 같은데, 2층에 있었어요. 그때는 소주도 안 나올 때인가 그래. 맥주나 소주는 고급술이지. 경찰서 앞에 보면 막걸리 도가가 있었어요. 여전히 8시에 출근해서 여전히 5시에 퇴근했죠. 회사에 뭐 그렇게 힘든 건 없어요. 내가 주로 한 일은 전기 설비 관리지. 전기는 별도로 독립이 되어 있지. 과장님도 있고 그렇지요. 공영화학에 9년 댕겼나! 1976년에 대리로 퇴직했어요.

◆ 1976년 1월 1일 고려아연으로 옮겼죠. 1년 이상 서울 본사에 있었지요.

1976년 1월 1일 고려아연으로 옮겼죠. 공영화학 퇴직하고 나서 회사 이름이 한화케미칼로 바뀌고 한양화학은 나중에 합해졌지. 당시 온산 벌판에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때 1976년도에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래가지고 우리 들어가고 1976년도에 공장 터를 닦았지. 전기 기술자들이 많이 필요하지. 독일에서 좀 있었지. 그때만 해도 여행 자유화가 되기 전이라서 우리 댕길 때는 참 좋았어요. 한국 사람도 없고, 그러니까 어디 가도 그냥 한국 사람이 드무니까, 대접받고 그런 거지. 석 달인가 있었지. 토목건축을 주로 우리나라에서 하고, 기계 전기는 거기서 이제 해주고. 토목건축은 그때만 해도 우리나라 괜찮았거든요. 그때 여기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1년 이상 본사에 있었지요. 서울에서 1년하고 조금 더 있었어요. 나 혼자 가 있었지. 내가 주로 하는 일은 전기 쪽 감독이지. 과장이었어. 고려아연 경력직으로 갈 때 과장으로 갔어. 우리 과 인원이 50명 정도.

◆ 고려아연에서의 노동생활

공장 지을 때 사고는 없었어요. 사고는 없었는데, 짓고 나서 운전할 때 폭발도 나고 화재도 나고, 그 다음에 외부에서 들어와 가지고 지붕 같은 거 하다가 슬레이트 같은 데, 떨어져서 사람도 죽고 이랬는데…. 전기 설비가 큽니다. 엄청나게 커요. 기계는 눈으로 보이는데, 전기는 눈으로 안 보여. 그러니까 공부할 때도 전기는 좀 어려워요. 지금은 전자전기가 굉장히 많잖아요. 우리 다닐 때만 해도 전기과 있는 데가 서울공대하고 한양공대하고, 연세대학하고, 인하공대. 4개뿐이 없어가지고 해마다 가을이 되면 친선 배구대회도 하고 그랬어. 요새는 공대 없는 대학이 없잖아요.

◆ 회식하러 여기(원도심)까지 나오는 거지.

내가 관리하는 인원은 50명 정도고, 회식 가끔 했지요. 회식도 한꺼번에는 못하고, 필요한 사람만 해가지고,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하지. 온산이 개발이 안 됐으니까, 회식하러 여기(원도심)까지 나오는 거지. 여기까지 나오든지 아니면 저쪽 강양에 회 먹으러 가고. 여기서는 여가 활동 없어요. 쉬는 날은 골프 치러 댕기고, 회사 동료들하고. 1992년에 퇴직했어요.

1970년대 말에 포니를 샀어. 그때는 면허시험 치려면 마산까지 가고 그랬어요. 그때는 울산광역시가 아니거든. 경상남도 울산시니까 마산 가서 시험 치고, 이론이야 뭐 그냥 치면 다 되니까, 그 나중에 주행시험은 마산에서 중리인가 언덕배기가 있어. 거기서 포터 그 뒤에다가 쫙 태워가지고 선생님은 옆에 있고, 거기서 몰고 가는 거야. 차가 별로 없을 때니까. 거기서 그냥 합격 불합격.

◆ 고려아연 건설 초기만 하더라도 주변 환경은 괜찮았어요.

공장 안에는 운동시설이 거의 없어요. 공장 안에 공터가 전에는 있었는데 지금은 뭐 하나도 없지. 공장 안에 있는 거 해봐야 목욕탕이 있고, 그 외에는 없다. 목욕탕, 식당 요거 말고는 다른 시설이 없지. 식당 음식은 괜찮아요. 점심시간에 식당 앞에 줄 서는 거는 다 그래요. 왜 그러냐면 12시 전에 다 간다고. 그래가지고 현대자동차에 노조 직원들이, 간부들이 외국 회사 갔을 때, 연수 갔다 왔는데 이야기를 못 하는 거야. 거기는 딱 12시 되면 자리에서 뜨고, 그다음에 1시 되면 딱 제자리에 가 있는데, 여기는 일찍 가고 늦게 오고.

◆ 내가 만난 울산의 모습들

울산의 핵심적인 장소에 이화약국도 들어가죠. 그전에는 택시 타면 다 알았어. 오래됐으니까 알고, 이 길이 옛날에, 제법 번창했던 길이기 때문에, 지금이야 저쪽으로, 남구로 많이 옮겨졌지만. 알만한 데라야 은행 하나 있고. 여기 농협 있다가 이사 가버렸지. 성남시장 안에 거기 칼국수 집이 있었는데, 점심시간 되면 줄을 서야 돼. 전부 그때만 해도 유명한 칼국수 집이 몇 개 있었는데, 점심시간에 줄이 제법 길었어요.

동네 사람들이 특별히 모일만한 장소도 없어요. 다방 같은 시설도 없고. 거성다방은 있지. 우리 2층하고 여기 뒷집하고 해가지고, 여기 원래 붙어있었거든요. 여기 울산에서 제일 큰 카바레야. 이름을 모르겠어. 여기 우리 2층하고 저기 뒷집하고 전부 터 가지고 울산에서 제일 큰 카바레 했었어. 하여튼 이 동네가 시끌벅적했어. 아침 되면 여기에 어깨가 부딪칠 정도로 출근할 때 사람들이 많았어요.

◆ 제2의 고향이죠. 지금은 완전한 안식처지.

제2의 고향이죠. 이제는 떠나봤자 별 의미가 없어요. 서울에 가도 친척들 중에 너무나 많은 분이 돌아가시고, 이제 우리 세대만 겨우 남았거든요. 그러니까 뭐 가도 큰 의미가 없다. 오히려 젊었을 때 이렇게 서울에 가끔 어머니네 가면 고속버스 터미널에 내리면 답답하잖아. 너무 답답하다. 그런 건 많이 느꼈어요. 그때 공기도 안 좋고, 일단 서울에서 흰 와이셔츠를 입고 사흘만 지나면 다시 못 입을 정도로. 사람들이 와서 우리 울산은 그래도 괜찮다고 그랬어. 울산은 이제, 지금 떠날 수도 없고, 지금은 완전한 안식처지.

정리=이다예 기자/제공=울산발전연구원 울산학연구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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