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북 이산가족상봉 최종명단서 탈락된 울산 거주 중인 이인상 어르신은 상봉 자리에서 어떤 말을 하셨을 것 같냐는 기자의 물음에 "그간 가족들이 어찌 살았고, 부모님이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나 물어보려고 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지금도 생생해. 1951년1월10일, 그니깐 열여덟 살 먹었을 때 부모님이 ‘인민군이 설마 우리까지 헤치겠냐. 형하고 먼저 가라’해서 황해도 집에서 형이랑 손잡고 뛰었지. 이번에 북녘에 놔두고 온 여동생들 만나면 어머니, 아버지는 어떻게 지내셨는지, 언제 돌아가셨는지 물어 보려했지. 지금에 와서는 고향에 안간 게 후회가 돼. 이제 평생에 한번이라도 볼 기회가 있을까 싶어.”

황해도 송화군에서 살던 이인상(85) 어르신은 1951년 1·4후퇴 이후 며칠 뒤, 부모님 말씀에 따라 형 봉상(92) 씨와 함께 월남하다가 그 길에 헤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황해도의 초도로 향한 이 씨는 그 곳에서 이틀 후 형과 눈물의 상봉을 했다. 이후 형제는 군산으로 이동해 피난민수용소 생활을 이어갔다. 배고픔에 못 이겨 동료들과 인천에서 먹을거리를 찾으러 다니고, 연평도로 다시 넘어가 일주일을 버티는 등 생사의 갈림길을 오고 갔다. 이들 형제는 살길을 찾기 위해 이 씨는 목포로, 형은 서울로 향하며 다시 기약 없는 이별을 했다.

이후 이들 형제가 재회한 건 이 씨가 진해에서 군 복무 중일 때였다. 해군에 지원했던 이 씨는 1953년부터 1963년까지 해군으로 지냈는데, 당시 그의 형은 잃어버린 동생을 찾기 위해 전국적으로 수소문했다고 한다.

때마침 서울 충정로에서 형과 이 씨의 후배의 거짓말 같은 만남이 이뤄졌고, 그렇게 이들은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군 제대 후 이 씨는 일을 하기 위해 SK울산공장 안전과에 취직한 이후 여태까지 울산에서 줄곧 살고 있다. 남쪽에서 유일한 피붙이로 서로 의지하고 살았던 형마저 1999년 그의 곁을 떠났다.

이에 이번 남북 이산가족 상봉은 그가 나머지 가족들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울산에서 2명밖에 없던 이산가족 2차 생사확인자 명단에도 올라, 북에 두고 온 여동생 옥순·옥선·옥란과 남동생 용상의 얼굴을 어루만져볼 수 있을까하는 일말의 기대는 더해졌다.

하지만 가족들의 생사가 확인되지 않는다는 최종 통보에 이마저도 결국 좌절됐다.

남구 SK유우회 사무실 인근에서 만난 이 씨는 “형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스스로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한 건 이번이 처음”이라며 “이번 기회에 북녘에 있는 동생들을 만나, 그간 안부도 묻고 아버지가 언제 돌아가셨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그저 물어보고 싶었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이어 그는 “최종 탈락 소식에 주위에서 많은 위로를 받았다. 이제는 가족의 생사를 알면 뭐하나 싶다”며 “지금보다 더 나이 들어 90살 노인이 되면 더 이상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겠냐”고 희망과 체념이 뒤섞인 심경을 털어놓았다.

끝으로 '나이 들수록 건강해야된다는 생각이야. 운동도 열심히 하고, 끼니도 잘 챙겨먹으려고 한다'면서 “더 이상 북녘 땅은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 ‘울산’이 내 고향이다”고 덧붙였다.

이북5도 울산사무소에 따르면 현재 울산지역에서 이산가족 및 실향민 가족을 전체 포함한 수는 9만1,000여명으로 추정된다.

이북5도 관계자는 “이산가족 어르신들은 생애 마지막 희망을 품고 상봉 신청을 하는 것”이라며 “하루빨리 정확한 생사 확인을 비롯해 체계적이고 실질적인 방향으로 어르신들의 상봉을 돕고 진행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편, 2년10개월 만의 제21차이산가족 상봉 행사에 참여하는 남측 가족들은 20일 1회차 행사로 금강산에서 북측 가족들을 만난다. 이들은 사흘간 6차례의 상봉 일정을 모두 마치고 오는 22일 오후 육로로 귀환한다. 2회차 행사는 24일부터 26일까지 금강산 관광지구에서 동일한 일정으로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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