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년 일본 와세다대학 법학과를 졸업한 그는 일제 강점기 최초의 조선인 판사가 됐다. 평양 법원에서 판사로 10년 동안 근무하던 어느날 조선인 피고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뒤 그 죄책감으로 고민하다가 홀연히 법복을 벗어던진다. 그 후 3년 동안 엿장수로 세상을 떠돌다가 38세에 금강산 신계사에서 출가했다. 조계종 통합 종단의 초대 종정을 지낸 효봉스님의 삶은 한편의 드라마와 같다.

출가하면서 자신을 오직 ‘못 배운 엿장수’라고 소개한 까닭에 처음에는 ‘엿장수 중’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법원에서 함께 근무했던 일본인 판사가 절에 놀러 왔다가 그를 알아본 뒤로는 1966년 입적 할때까지 ‘판사 스님’으로 불리게 됐다고 전한다.

지난 1월 대법관직에서 퇴임한 여판사 박보영 전 대법관(57·사법연수원 16기)이 ‘시골 판사’로 다시 법복을 입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대법원은 박 전 대법관을 원로법관에 임명하고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원 여수시법원의 1심 소액사건 판사로 전보했다고 밝혔다.

대법관급 최고위급 판사 출신이 돈방석에 앉을 수 있는 대형 로펌, 대학, 변호사 개업 등을 선택하지 않고 시·군 법원 판사로 다시 법복을 입게된 것은 박 전 대법관이 첫번째 사례다. 2년이 지나면 변호사로 개업할 수 있다. 박 전 대법관은 대형 로펌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대법원 사건을 맡아 ‘전관예우’를 받는 많은 대법관과는 다른 길을 걷는 첫번째 판사여서 법조계에 신선한 충격이 되고 있다.

시·군법원 판사는 대부분 관할 법원 판사가 순환 근무하는 식으로 운영할 정도로 지원자가 거의 없다. 대법원은 박 전 대법관의 고향이 전남 순천임을 고려해 근무지를 여수시 법원으로 정했다. 박 전 대법관은 “봉사하는 자세로 여수시 법원 판사업무를 열심히 수행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언론사의 인터뷰 요청을 모두 거절한 것으로 알려진 박 전 대법관은 고향인 순천 인근에서 원로법관으로 정년(만65세)까지 봉사하고 싶다는 뜻을 주변에 밝혀왔다.

지방(시골) 법원에 말뚝을 박은 향판(鄕判)이 있긴 했지만 대법관 출신 판사가 시골 판사를 자원한 일은 없었기에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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