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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에세이] ‘행복했던 날’은 왜 쉽게 잊혀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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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병길 주필
  • 승인 2018.09.12 22:30
  • 댓글 0
나쁜 기억 일수록 잘 잊혀지지 않아
인간 뇌에 주어진 축복 중 하나 ‘망각’
좋은 기억은 저장력 낮아 잘 잊혀져

 
기억 없으면 과거 없고 미래 계획 못해
남은 기억이 적으니 노년 시간 빨리가
상상력 떨어지면 기억력도 떨어져
기억에 남는 하루를 만들기 위해서는 사소한 일에 대해서도 궁금증을 가져야 한다.
 
김병길 주필
 최근 우리나라를 다녀간 이스라엘 태생 53세의 에란 카츠는 기억력 부문 세게 기네스 기록 보유자다. 숫자 500개를 한 번 듣고 그자리에서 줄줄 외웠다.

그는 슈퍼기억력의 비결을 “상상력”이라고 했다. 무언가를 외울 때 이미지로 연관시키면 쉽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면 강아지-드레스-자동차-콜라 라는 네 개의 단어를 외워야 한다면 각각을 외우는 게 아니라 강아지가 드레스를 입고 자동차를 몰며 콜라를 마시는 장면 하나로 기억한다. 기억할 내용을 머릿속에서 상세하고 분명한 이미지로 만들거나 쉽고 재미있는 스토리로 만들어 기억하라는 것. 그는 “상상력이 논리보다 강하다”고 했다.

성인이 기억력이 떨어지는 것 역시 노화 때문이 아니라 상상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따라서 기억에 남는 하루를 만들기 위해 사소한 일에 대해서도 궁금증을 가지라고 조언했다.
좋은 기억력이 성공의 지름길이라면 망각은 ‘잘 살아가는 데’ 필수적이다. 또 기억하는 만큼 망각도 중요하다. 인간 뇌에 주어진 큰 축복 중 하나로 망각을 꼽았다. 망각은 새로운 기회를 준다.

과거의 상처를 잊어야 새로운 미래가 온다. 지나간 기억을 지워야 새로운 것을 생각할 수 있는 공간이 뇌에 생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억하는 것만큼 잊는 것도 어렵다. 특히 너무 잊고 싶은 나쁜 기억일수록 잊혀지지 않는다. 망각의 비법은 ‘용서’다.

용서하다(forgive)와 잊다(forget)가 비슷한데, 이유는 우연이 아니다. 타인과 나를 용서해야만 완벽하게 잊을 수 있다. 잊어버리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기억은 경험·학습한 내용이다. 안 잊어버리고 그 틀에만 맞춰 살면 새로운 사고를 만들어내기가 어렵다. 나이가 들면 약간 너그러워지는 것도 잊어버리기 때문일까? 물론 도가 지나치면 문제가 되겠지만.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땐 몇초라도 더 상대의 얼굴을 지켜보며 이름·외모에 연결시킬 만한 특징을 속으로 새겨두자. 일종의 게임처럼 언제 어떤 모습으로 만나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비주얼 이미지를 자주 떠올리며 훈련하면 더 오래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스마트 기기에 의존하며 기억력이 감퇴하는 ‘디지털 치매’에 대해선 시장을 볼 상품목록이나 행선지의 경로를 일부러라도 기기 없이 기억하려 노력해야 방지할 수 있다.

강봉균 교수(서울대 생명과학부)는 최근 기억의 물리적 실체를 세계 최초로 찾아냈다. 뇌 속 신경세포에서 나뭇가지처럼 뻗어나온 돌기인 ‘시냅스’가 기억을 만들고 저장한다는 것이다. 그는 2012년 인간의 기억에 대한 연구 실적으로 ‘국가과학자’에 선정된 바 있다.

기억은 추상((抽象)이 아니라, 신경세포의 특정 시냅스 간에 이뤄지는 전기화학 작용이다. 새로운 정보가 들어와 저장될 때 시냅스가 커진다. 커질수록 기억이 강렬하다는 뜻이다. 세월이 지나 기억이 사라지면 시냅스 크기가 줄어든다.

괴롭고 슬프거나 수치스럽고 불쾌한 일은 왜 잘 잊히질 않는가. 반면 즐겁고 행복했던 시간은 왜 쉽게 희미해지는가? 나쁜 기억이 오래 가는 것은 생존 본능과 직접 관계가 있다. 쥐를 대상으로 실험해보면 공포의 경험은 한 번이어도 오래 기억된다. 그때 형성된 시냅스는 쉽게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커져 있다.

어떤 인물이나 시대를 평가할 때 그 성취는 쉽게 잊고 어두운 면만을 떠올리는 태도에도 이런 기억의 선택이 작용한다. 장차 기술적으로 특정 기억을 사라지게 하거나 변형시키거나 없던 기억을 만들 수도 있게 될 것이다. 쉽지는 않겠지만 기술적으로 가능하다고 본다.

기억은 동물의 생존에 필수 기능이다. 아주 단순한 신경계를 가진 동물도 먹잇감, 포식자, 배우자에 대해 배우고 이를 제대로 기억해야 생존을 담보할 수 있다. 인간과 같은 고등동물에게 기억은 생존 이상의 의미가 있다. 기억은 자기 정체성의 핵심이다. 기억이 없으면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기억이 곧 나 자신이라는 뜻이다. 기억이 없으면 내게는 과거가 없고 미래도 계획할 수 없다. 항상 현재에만 머물러 있게 된다.

애초에 우리 인생은 기억의 상실(喪失)과 함께 시작된다. 서너살 이전의 기억은 왜 없을까. 생애 초기에는 신경세포가 형성되는 과정이다. 서술 기억을 저장하려면 언어능력이 필요한데, 서너살 때는 언어 능력이 완전히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기억이 저장되면서 정체성이 형성된다. 개인의 차이란 결국 얼굴과 이름이 달라 구별되는 게 아니라 뇌의 모습이 다른 것이다.

기억력이 너무 비상했던 사람들의 인생은 별로 행복하지 못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지나친 기억력으로 두뇌 기능이 혼란스러웠고 필요한 기억보다 필요 없는 기억이 더 오래 지속됐기 때문이다. 기억과 망각의 적절한 조화가 이상적이다.

시간의 길이와 속도는 기억과 관계가 있다. 노년의 시간이 화살처럼 빨리 지나가는 이유는 일상에서 기억에 남을 만한 게 없기 때문이다. 저장되는 기억의 양에 따라 시간의 길이를 상대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소년시절의 경험은 거의 대부분 새로운 경험이기에 정보의 양이 방대하다. 하루하루가 꽉 차 있는 느낌이다.

반면 노년에 이뤄지는 경험은 새로울 것이 없고 반복적 일상이다. 그런 일상적 경험은 기억에 거의 저장이 안된다. 또 뇌의 기억저장 능력도 떨어진다.

회고록에서 고(故) 조비오 신부를 비난했다가 사자(死者) 명예훼손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전두환 전 대통령이 치매증세로 출석하지 않아 재판이 연기됐다. 38년이 지난 5·18 관련기억도 사라지고 있다. 정확한 회고는 정확한 기억의 산물이다. ‘보이는 것’만을 가지고 ‘기억’을 만들어서는 안된다. 우리의 기억이 우리를 속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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