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방 생각 바꿔 자신에게 맞추길 강요하는 어리석음
자신이 억압당할 때 과연 받아들일 수 있을지 고민해야
주위환경 차이는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껴안고 가는 것

 

이규원 시인

필자의 아내는 필자를 가리켜 ‘로또’라고 부른다. 필자를 만나 팔자가 폈다는 즉, 지위가 향상 됐다거나 돈을 잘 벌어다줘서 부족함 없이 잘 살고 있다거나 하는데서 기인한 일반적인 호명이 아니다.

아내의 말을 빌리자면 둘의 관계가 안 맞아도 너무 안 맞는다는 의미에서 붙였다는 것이다. 좋아하는 음식은 물론이고 취미, 성격 등 뭐 한 가지라도 맞는 것이 없다고 하여 필자를 로또라 부른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외출 시 대문 밖에서 느려터진 필자 때문에 기다리기 일쑤고 외식메뉴를 고를 때도 매번 필자에게 양보해야 하고 식사시간 대중목욕탕 가는 타이밍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이쯤에서 필자의 어머니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언젠가 땡볕아래서 밭을 매다가 하시던 넋두리를 옮겨보면 이렇다. 

“가시나를 낳았으면 그냥 삶아 묵고 말일이지 문디 같은 할마씨 전장에서 죽은 애비 원망하라며 학교도 안 보내고 죽도록 일만 시키고 머슴한테 가야 평생 일 안 하고 살 수 있다며 요래 모진 데로 시집보냈겠나. 그마이 싫다고 도망치던 나를 방에 가다놓고 일을 치렀제. 내 인생 말로 우째 다 하겠노. 아들이 알겠나! 딸이 알겠나! 인자 밭에 오는 것도 몇 번이나 쉬면서 겨우 온다. 의사가 그라는데 골반 뼈가 다 닳아 수술도 안 되니 그냥 묵고 노는 수밖에 없다던데 저 밭에 풀 좀 봐라! 아이구 내 팔자야! 이러다 저승길이나 제대로 가 내겠나. 지금이라도 한 열흘 내 맘대로 살다가 어데 좋은데 있으면 갈란다.”

하도 애잔하게 들려 토씨 하나 안 틀리게 기억한다. 필자의 어머니는 남편과의 첫 만남부터 이승을 떠나보낸 뒤 몇 해가 지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좋은 기억을 얘기한 적 없다. 남편이 세상에 없는데도 억울함을 잊지 못하고 원망한다. 

살아있을 때 떵떵거리며 큰소리치면 그만일까? 죽음 뒤 남겨질 무언가에 대한 배려는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일까? 무서워지기도 하고 서글퍼지기도 한다. 

우리는 상대를 처음 만나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양보해야만 했던 것들과 따뜻하게 감싸 안고 있었던 상대의 결함을 비롯해 자신과는 다른 세계로부터 오는 신선한 충격 같은 것들과의 만남은 단정컨대 받아들이기 힘든 정도의 아픔을 동반하지는 않는다. 

서로를 인정하든 인정하지 아니하든 결혼해 같이 살게 되면서부터 부딪치게 되는, 내가 언제? 내가 왜? 라는 문제에 봉착하게 되고 상대의 생각을 바꿔서 자신에게 맞추기를 강요하게 되는 것은 전혀 새로운 발견이 아니라는 것쯤은 직접 경험을 통하지 않고서도 누구나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다만, 자신에게 닥쳤을 때 과연 상대의 입장에서 한번쯤 돌아볼 수 있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자신의 영역을 넓히면서 저질렀던 상대에 대한 억압과 무시를 후회하고 상대의 마음을 헤아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시공을 초월하는 타임머신을 소재로 선택하는 드라마가 많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그것도 자신이 가진 문제점을 알지 못하면 의미가 없지 않은가? 결국 상대에게 스스로 복수의 대상임을 인정하고 변화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만이 응징을 피해 부드러운 복수의 전야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 울산의 모 시인이 맡고 있는 중구 문화의전당 시창작 강의를 대신한 적이 있는데 당시 자료집이었던 모 시인의 시집에서 독일 소설가 토마스 만의 중편소설 ‘토니오 크뢰거’에서 인용했다는 ‘부드러운 복수‘라는 시를 만났다. 소설 속 주인공은 건강한 시민적 세계와 감성적 예술적 세계에서 갈등하며 닮은 듯 서로 다른 존재에 대한 소외감에서 출발해 결국 상처는 극복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 껴안고 가야한다는데 합의에 도달하게 된다. 

되짚어보면 유전자적 의미의 성향이나 가족력 또는 친구들과의 관계까지 개개인의 살아온 주위환경의 차이는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껴안고 가야할 것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게 된다.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세포가 굳이 죽음이라는 형벌을 감수하면서까지 더 커다란 세포집단의 일원으로 살고자 한 미토콘드리아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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