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목관 홍세태가 남긴 조선 후기 울산의 생활·문화
17. 대왕암

홍세태의 초상

 

한산한 교외(郊外) 구름과 만물은 우거져 푸른데
마골산 산봉우리 석양에 반쯤 잠겨있네.
목자들은 목장의 목책 수리에 전념하고
행인(行人)들은 어쩌다 고깃배 빌려 낚시 하네.
관리는 먼 객과 같아 어찌 이리도 무료한지
늙어 시(詩) 짓기에 격앙되어 있네.
모든 일들 하늘 높아 물어 볼 수도 없는데
동쪽의 푸른 바다는 선왕(先王)에 곡(哭)하네.
 

寒郊雲物莽靑蒼 摩骨千峰半夕陽

牧子多依遮馬柵 行人或借釣魚航

官同遠客何寥落 詩到衰年尙激昂

萬事天高不可問 東臨滄海哭先王


위의 시는 ‘목장의 풍경(卽事感懷)’으로 목책 수리작업을 노래한 시로 목자들의 일상과 관련된 한시이다. 그런데 그들이 이렇게 힘들게 목책 수리작업을 해야 하는 것은 앞선 시기 겪었던 임진왜란의 아픔과도 연결된다.
그림=배호.

그리고 이런 역사적인 아픔은 또한 문무대왕의 호국 정신을 이어받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오늘도 넘실거리는 동해바다 푸른 파도는 끊임없이 바위에 부서지고 있다. 마치 곡(哭)하듯 주기적으로 우는 듯해서 슬프다.

한편, 울산의 방어진에는 대왕암이라는 바위가 있고 이곳을 중심으로 대왕암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이곳은 지역의 대표적인 명승지로 매년 1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찾는 울산에서 가장 관광객이 많은 곳이다.

그런데 지역에서는 이 대왕암이 왕과 관련되어 있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신라왕의 장골처라 하기도 하고 문무왕 왕비의 무덤이라고도 한다. 심지어는 위의 시를 근거로 하여 문무왕의 장골처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이유로 한 때 해마다 봄철이 되면 지역의 어떤 사회단체가 문무대제를 지내기도 했다.
이처럼 의견이 이렇게 분분하게 된 것은 먼저, 문무왕의 왕비와 관련되었다는 대왕암의 전설이 확대 재생산되면서 정설로 굳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경주의 ‘대왕암’을 부정하면서 지역에 대한 애향심이 지나치게 작용하면서 이러한 오해를 재생산하게 되었다.

1872년 지방도 울산목장지도.

먼저, 문무왕의 왕비와 관련된 전설은 지역의 저명한 향토사학자인 이유수에 의해서이다. 이유수는 이 댕바위를 ‘전설’ 항목에서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문무대왕이 돌아가신 뒤에 그의 왕비도 세상을 떠나니 용이 되었다. 대왕이 생전에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죽어서도 호국의 대룡(大龍)이 되어 그의 넋은 쉬지 않고 바다를 지키거늘 왕비 또한 무심할 수 없었다. 황후의 넋도 큰 용이 되어 하늘을 날아 울산을 향하여 동해의 한 대암 밑으로 잠겨 용신이 되었다 한다. 그 뒤 사람들은 그 대암을 대왕바위라 하더니 세월은 흘러 말이 줄여 댕바위라 하였다’는 전설에서 유래하게 되었다.

두 번째로 신라왕의 장골처라고 주장하는 사람으로는 김송태의 경우이다. 그는 「삼국유사」 연표편의 ‘효성왕은 화장하여 동해에 산골했다’라는 기록에 의거하여 신라 34대 효성왕의 능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 향토문인 이양오(1737~1811년)는 ‘유은모군과 함께 바다를 보고 대왕암에 오르다.(與柳君殷模觀海登大王巖)’라는 시를 지를 지었다. 이것은 울산의 대왕암을 시적 제재로 쓴 것이어서 관심을 끈다.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918년 ‘대양암’이라 표기된 일제 때의 지도.

유은모군과 함께 바다를 보고 대왕암에 오르다
 

1. 큰 바다의 서쪽 물가는 대왕암인데   
누가 나부끼듯 보내는가 도적을 막는 수레를 
 
건너 포구의 흩어진 산에는 조각구름이 떠 있는데   
싱그러운 풀밭 떨어지는 꽃잎에는 짝을 지은 나그네 있네.
 
너럭바위에 노닒은 풍광이 좋기 때문인데  
잠시 머물러도 바다 맛을 알게 되네. 
 
넓고 넓은 푸른 바다의 관대함은 그 얼마인지  
지금의 이 장관은 동남에서 다하네.
 

與柳君殷模觀海登大王巖

大洋西畔大王巖 誰送飄飄禦寇驂

隔浦亂山雲片片 落花芳草客三三

盤遊只爲風光好 暫住猶知海味甘

納納滄溟寬幾許 壯觀今日盡東南


2. 남목 산천은 바닷가에서 열리고  
대왕암은 어풍대를 압도하네. 
 
깊고 깊은 동굴에선 비룡이 나오고  
우뚝 솟은 기암은 만물상으로 널렸네.
  
가랑비 맞으며 나그네는 방초(芳草) 속을 걸어가고  
석양에 돛배는 띠를 이뤄 물보라와 함께 돌아오네. 
 
매양 경승지를 만나니 시를 짓기에 여유 있는데  
어부 집에서 탁주잔을 기울이네. 

南玉山川傍海開 大王巖壓御風臺

深深洞穴飛龍出 立立奇巖物象排

細雨客穿芳草去 夕陽帆帶浪花來

每逢佳處餘詩債 漁戶因傾濁酒盃

그런데 대왕암은 ‘울산목장목지『嶺南邑誌(1871)』의 기록에 의하면 ‘용추암(龍湫巖)은 관기 남쪽 20리쯤에 있다. 대양암(大洋巖)과 일산진의 경계이다. 큰 바다 가운데 있다’라 되어 있다.

또한 1872년 목장지도와 1918년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울산의 지도에도 ‘대양암’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로 보았을 때 울산 동구의 ‘대왕암’은 ‘대양암’을 ‘대왕암’으로 음운착각으로 굳어졌을 가능성과 ‘큰 바위’ 즉 ‘왕바위’라는 의미의 ‘댕바위’로 부르다가 ‘대왕암’으로 굳어진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지역의 전설과 관련되어 있고 지역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이미 굳어진 지명임으로 ‘대왕암’이라 부르는 것이 옳다고 생각을 한다. 하지만 대왕암의 유래가 ‘대양암’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는 개인적인 의견임을 밝혀둔다.

한편, ‘용추암에서의 저녁 때 내리는 비’ 즉, 용추모우(龍湫暮雨)는 과거 동구를 대표하는 명승지로 동면 8경 가운데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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