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목관 홍세태가 남긴 조선 후기 울산의 생활·문화
18. 감나무골과 당고개

홍세태의 초상

1)감나무 골(枾谷)
 
경치 좋은 곳으로 가서 앉았더니
아전(衙前) 몇 명 따라왔네.
 
외로운 봉우리 구름 뚫고 나와 아름다운데
작은 여울의 물은 쉬엄쉬엄 흘러가네.
 
움푹 들어간 발자국은 서로 젖어들어도
그윽한 회포는 절로 알게 되네.
 
매양 와서 고갯마루와 함께 하는데
나는 감히 옛 사람을 기약하네.
 

勝處方爲坐 仍兼數吏隨

孤峰雲出細 小澗水流遲

漫跡雖相混 幽襟只自知

每來同峴首 吾敢古人期
 

 위 시의 제목은 ‘감나무 골(枾谷)’이다. 하지만 당시의 ‘감골’ 또는 ‘감나무 골’은  어디를 의미하는 지는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매양 와서 고갯마루와 함께하며 아전 몇 명이 따라 나선 것으로 보아 감목관청과 매우 가까운 거리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지금의 ‘감골’ 또는 ‘감남골’로 보아야 한다.

그런데, 계곡이 깊고 옥이 흐르듯 물이 맑아서 옥류천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과거 동구지역을 대표하는 명승지 가운데 하나로 동면 8경 가운데 제2경으로 ‘옥류춘장(玉流春張)’이라 부르는 곳이다. ‘옥류춘장’은 봄비에 옥류천의 계곡물이 넘쳐 흐르는 풍광을 말한다. 이런 명성을 갖고 있는 옥류천은 아무리 더운 여름날이어도 마르지 않고 항상 맑은 물이 흘러서 지금도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산책길로 유명하다.

한편, 이 옥류천은 과거에 세계적인 뉴스가 되기도 했던 일명 가재소년의 계곡이기도 하다. 1979년도 어느 날 남목 어린이들이 옥류천에서 가재를 잡다가 실종되었다가 29일 만에 구사일생으로 구조되었다. 이 어린이들은 산 속에서 가재와 나무껍질, 산딸기 등을 먹으며 지냈다고 한다. 그 때 그 어린이들의 나이가 예닐곱 정도였다. 정말 기적 같은 사건이었다. 이 일로 인해서 이 어린이들은 전국적으로 화재가 되었고, 새로운 기네스 세계 기록을 세우며 외국 언론에서도 주목받는 사건이 되었다. 당시 외국의 한 학자는 창자가 한국인보다 짧은 서양 사람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생명력이라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감골’에 대한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 지역민들은 옛날에 감나무 또는 밤나무가 많았던 골짜기이어서 이렇게 불렀다고 말하고, 장세동씨는 『울산 동구 지명과 문화이야기』 102쪽에서  ‘감골’, ‘감나무골’은 ‘신령스러운 마을’, ‘큰 마을’ ‘중심마을’의 뜻을 갖는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청자를 굽던 가마가 있던 곳, 다시 말해서 가마골에서 감나무골로 전이 된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 ‘감골(枾谷)’ 위쪽으로는 성혈 유적지가 여러 곳에 있으며 청자가마터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청자가마터는 울산에서도 많지 않은 유적이다. 하지만 청자가마터를 지역민이 경작(耕作)하고 있기 때문에 훼손이 아주 심한 상황이다. 그러므로 빠른 시일 내에 학술용역조사가 필요하다.

그런데 성혈은 바위그림의 하나로 바위의 표면에 새겨져 있는 알 모양의 구멍이 있는 바위를 말한다. 성혈의 형태는 대동소이하며, 그 명칭도 ‘성혈’, ‘알구멍’, ‘홈구멍’, ‘알터’, ‘알미’, ‘알뫼’ 등으로 다양하다. 또한 ‘알바위’는 세계 각지에서 확인되며, 신석기시대부터 시작되어 현재까지 계속 조성돼 온 것으로 보고 있다. 성혈은 여성 성기의 상징인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신앙적 의식의 표현으로 보기도 하고 고대인들의 별자리를 새긴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런데 별자리로 판단하는 것으로는 북두칠성과 좀생이 별자리와 삼태성 등이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동부동의 성혈 중에도 북두칠성과 좀생이 삼태성 등으로 보이는 것도 있고, 주전 넘어가는 관비알산 바위 위에는 특별한 제의 의식을 행한 것으로 보이는 알바위도 있다. 또한 구룡포의 옛 목장지인 장기지역의 알바위 중에는 성혈과 성혈을 날카로운 선으로 연결한 특이한 모양을 갖고 있는 것이 있어 눈길을 끈다. 앞으로 이에 대한 연구도 필요할 것으로 판단이 된다.
 

감남골 알바위. 장세동씨가 제공한 사진으로 학술용역조사 당시 발견되지 않았던 별자리로 추정되는 성혈.

 
2) 당고개
 
한 개의 산 봉오리 구름 위 솟았는데
논둑 밭둑 이어져 펼쳐지니 마른 대추 주름 같네.
 
말들은 어느 골짜기에 노니는지 찾지도 않으면서
도리어 저 숲속에 호랑이 숨었을까 의심하네.
 
산은 갈라져 여러 고을로 흘러가는데
땅의 기세는 굽이쳐 큰 바다에서 다하네.
 
멍하게 보니 내 곁으로 산도깨비 다가 온줄 알았더니
늙은 소나무 옆 이끼 낀 돌, 비 몰고 오는 바람이었네.
 

一峰孤立出雲空 培塿旁羅衆皺同

不辨馬游何谷裏 還疑虎伏此林中

山形半割諸州去 地勢渾臨大海窮

怳見有峷來傍我 古松靑石霅然風


위의 시는 ‘당 고개에 올라서 목장의 지형을 보았다. 당 고개는 목장의 기도하는 곳이다.’ 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그러므로 당 고개는 말의 안녕과 건강을 기원하던 마단이 있었던 곳으로 보아야 한다. 마단은 보통 말의 조상신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봄․가을 관에서 제물과 향촉을 내리면 이것을 이용하여 제사를 지냈다. 아마도 과거 목장을 운영할 당시 서울로 진상마를 끌고 갈 때 서울까지 가는 도중에 말의 무사 안녕을 기원하는 의식을 했을 것으로 판단이 된다. 그런데 그 장소를 확인하지는 못하였다.

일반적으로 당 고개는 신령한 곳으로 여겼기 때문에 그 언저리에 돌무더기 등을 쌓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고개를 넘나들 때 건강과 행운을 빌며 돌을 던지는 풍습도 있었다. 지역에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남목에서 염포로 넘어가는 고개 마루에 쌓아둔 돌무더기에 엽전을 묻으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속설 때문에 돈을 묻었다고 한다. 이후 지역민들도 이곳에서 다양한 축원의 의미를 담아 돈을 묻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을 파서 구한 엽전으로 제기를 만들어 놀았다고 한다.
 

1872년 지방도 진주목장창선도지도.

이 고개를 당시 홍세태도 이곳에 자주 들렀던 것으로 판단이 된다. 그것은 염포를 주제로 지은 한시가 상당수 있고, 또한 이곳을 거쳐 병영에도 자주 갔을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남목 고개에 있는 당 고개는 목장과 거리가 너무 멀어서 ‘말들은 어느 골짜기에 노니는지 찾지도 않으면서, 도리어 저 숲속에 호랑이 숨었을까 의심(疑心)하네.’ 라는 시의 내용과는 거리가 있다. 그러므로 위의 시에서 말하는 당 고개는 시적 은유로 볼 수가 있다. 하지만 상황으로 보아서는 점마소와 가까운 곳 산마루 부근을 것으로 생각된다. 어찌되었던 이곳은 목장의 상황을 관찰하기에 좋은 곳임에 틀림없다.

위의 시에 의하면 작자는 그날도 평소처럼 목관을 떠나 나들이를 나갔을 것이다. 어느 듯 당 고개에 이르러 눈앞에 펼쳐진 논밭들을 보았다. 이곳은 구릉지로 언덕과 낮은 산이 많았기 때문에 밭두렁이 굽이굽이 펼쳐져 이어져 있다. 이런 모습이 대추주름처럼 복잡한 자신의 심정과 같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리고 어쩌다 보이는 간양군은 말이 어디 있는지 찾지도 않고 호랑이 찾기에 관심을 두는 듯이 보인 것이다. 이런 상황은 감목관의 일 보다는 다른 일에 더욱 열중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 같아서 반성을 하는 것이다.

한편, 땅의 기세 굽이쳐 흘러가면 큰 바다에 이르듯 자신의 인생도 끝자락에 이르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홀로된 몸으로 머나먼 타향에 남아있다. 그의 쓸쓸함과 외로움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그래서 늙은 소나무 이끼 사이로 불어오는 작은 바람결에도 도깨비인양 깜짝 놀라게 된다. 이런 그의 모습은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이 시인일 수밖에 없는 그의 예민한 감수성이 드러난다.

한편, 울산목장에는 마당(馬堂) 등 말의 안녕을 위한 제당에 대하여 「울산목장 목지」에 기록은 있지만 지도에는 그 위치를 표시하지 않았다. 그래서 「진주목장지도」를 참고하면 점마소 가까운 곳의 남산에 말을 제향 했던 ‘제마당’이 있다. ‘제마당’은 목관과 목장의 도로와 가까운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울산목장에서의 제마당은 모두 3곳인데 그 중에서 2곳은 점마소 인근 지금의 화정동 언덕부근이나 울산 과학대 부근에  ‘제마당’이 있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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