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초면 찾아오는 ‘노벨상의 계절’
‘혹시나’가 ‘역시나’로 바뀐다는 얘기
일본의 꾸준한 수상에 한국과 ‘23 대 0’

‘도박사이트’로 점쳐온 노벨문학상
명단 유출에 ‘미투’ 파문으로 시상 취소
오점 많아도 대신할 문학상 없어 허전

 

김병길 주필

매년 10월 초 노벨상이 발표되면 ‘혹시나’가 ‘역시나’로 바뀐다는 얘기가 있다. 국내 과학계 인사들은 노벨상 수상자가 발표되는 10월만 되면 고개를 들지 못한다. 국내 총생산(GDP) 대비 국가 연구개발(R&D) 예산(2015년 기준 1.21%)은 세계 1위면서도 노벨과학상과 인연이 없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웃나라 일본이 노벨과학상 수상자를 배출할 때마다 더욱 고개를 들기가 부끄럽다. 올해도 그랬다. 혼조 다스쿠 교토의대 교수가 10월 1일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23 대 0’이란 얘기가 또 쏟아졌다. 일본과 한국의 노벨과학상 수상자 숫자가 운동경기 스코어처럼 회자됐다.

동양권에서 노벨과학상 수상자가 나온 나라는 일본·중국·인도다. 이 가운데 꾸준히 맥을 잇고 있는 나라는 일본뿐이다. 일본은 1949년 첫 수상 이후 올해까지 23명째다. 20세기 후반기 업적을 바탕으로 2000년대 이후에만 18명이 받았다. 21세기 들어 압도적 1위인 미국의 다음 자리를 두고 영국과 경쟁하고 있다.

정말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일까. 10월 2일 발표된 2018년 노벨물리학상은 96세인 아서 애슈킨 박사(미국)가 프랑스의 제라르 무루, 캐나다의 도나 스트릭랜드와 함께 영예를 안았다. 레이저 물리학 분야의 발전을 이끈 공로였다. 역대 최고령 노벨상 수상자로 기록된 애슈킨 박사는 “내 시대는 이미 지났다고 생각했고, 수상은 생각도 못했다”면서도 “최신 논문을 써야하기 때문에 인터뷰 시간이 많지 않다”는 말을 전했다. 아직도 연구하느라 바쁘다는 얘기다.

‘노벨상의 꽃’으로 불리는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되기 전이면 매년 추리게임이 벌어진다. 여타의 문학상과 달리 후보작을 공개하는 과정도 없고 후보자 역시 따로 발표하지 않는 전통 때문이다. 

수상자 선정 과정 역시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다. 해마다 스웨덴 한림원 관계자의 아리송한 발언이나 역대 수상자의 국가, 소설가냐 시인이냐는 장르 등을 분석해 영미권이 아닐 가능성 등을 추측하는 정도였다.

이같은 비밀주의와 폐쇄성 덕분에 노벨문학상 수상후보는 오히려 영국 도박 사이트 ‘래드 브룩스’의 배당률을 보고 점치는게 더 정확했다. 2006년 수상자 오르한 파무크 때처럼 수상자를 정확히 맞힌 적도 있었고, 발표에 임박해 순위가 뛴 작가가 수상자가 되는 경우도 있었다. 
당장 그해가 아니어도 도박 사이트에서 거론되던 작가들은 몇 년간 시차를 두고 상을 받았다. 이 때문에 일단 도박사이트에서 물망에 오르면 언젠가는 수상하리라는 기대를 갖게 했다.
201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해 세계를 놀라게 한 미국의 가수 밥 딜런도 도박사이트에서는 꽤 오랫동안 단골후보로 꼽혔다.

세계 최고 권위를 자랑한다는 문학상이 거대한 도박판에 오르내린다는 건 어울리지 않는 일이지만 별 수 없었다. 작가들의 배당률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걸 보며 결과를 점쳐봐야 했다. 국내 문인 중 가장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매년 손꼽혔던 원로 시인도 한 때 순위가 3위까지 오르며 ‘이번엔 혹시?’란 기대감을 높이곤 했다. 10월이 되면 연례행사처럼 그에 관한 기사가 쏟아졌다.

그런데 올해는 노벨문학상이 실종되었고 떠들석한 ‘추리게임’도 사라졌다. 노벨상 가운데 유일하게 문학상은 수상자를 내지않기로 했다.

노벨문학상을 결정하는 스웨덴 왕립학술원의 추한 민낯이 드러나서다. 한림원 종신위원이 수상자 명단을 유출했다는 혐의가 드러나면서 큰 충격에 휩싸였다. 뿐만아니라 그의 남편이 한림원 소유의 한 아파트에서 성폭행을 저지르고 문화계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폭로까지 나왔다.

한림원은 초기에 미온적으로 대처하다 오히려 여론의 거센 역풍을 맞았다. 한림원 종신제 규정을 개정하는 방안과 도서관 사서, 일반시민이 개방적으로 참여하는 문학상을 만드는 방향까지 고려하고 있다. 어떤 결론이 나오든 그토록 폐쇄적으로 운영했음에도 끄떡없던 노벨문학상의 권위에 치명적 오점은 불가피했다.

공교롭게도 올해 우리는 노벨문학상 단골후보였던 그 시인의 추문으로 한해를 보냈다. 폐쇄적 문화권력, 권위와 전통의 허울 아래 오점까지도 대충 묻히고 용인되던 시절이 끝났음을 알렸다. 묘하게 한림원과 우리문단에서는 유례없는 가을을 보냈다.

마침내 10월 12일엔 카리브해를 대표하는 81세의 여성 작가 마리즈 콩데가 대안 노벨문학상으로 불리는 ‘뉴 아카데미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뉴 아카데미’는 스웨덴 한림원이 ‘미투(Mee too)’ 파문으로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 선정을 취소하면서 스웨덴 문화계 인사 100여명이 설립한 단체다.

마리즈 콩데는 카리브해의 프랑스령 과달루페 출신 작가로 제국주의가 세계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 작품을 통해 고발했다.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아가는 아프리카인의 아픔을 잘 그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파리 소르본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했으며, 미국 콜롬비아 대학 교수로 프랑스 문학을 가르쳤다.

17세기 미국 세일럼 마녀재판에 희생된 흑인 여성을 다룬 ‘나, 티투바:세일럼의 검은 마녀’와 18세기 서아프리카 배경의 작품 ‘세구’가 대표작이다.

‘뉴 아카데미 문학상’을 만든 뉴 아카데미는 한림원 종신제를 비판하며 인터넷 투표와 전문가 심사를 거쳐 최종 후보를 선정했다. 이들은 “전 세계 3만3,000여 독자가 참여했다. 완전히 새롭고 민주적인 문학상”이라고 자부했다. 하지만 사라진 ‘노벨문학상’, 그 자리를 대신하기엔 뭔가 허전하다.

저작권자 © 울산매일 - 울산최초, 최고의 조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