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동의 계절이자 백색·풍요의 계절로 불리는 가을
그 속에 담긴 이별의 정서에서 문인들 영감 얻기도 
푸른 하늘과 살랑이는 꽃 보며 순백의 시월과 작별

 

이병근 시인

가을의 정점에는 10월이 있다. 우리 민족은 10월을 ‘시월상달’이라 하여 한 해 농사한 곡식을 거두어 햇곡식으로 제상을 차려 공경하며 삼가고 엄숙하게 제천행사를 행하게 되는 10월을 가장 귀하게 여겼다. 환인의 뜻을 받아 환웅이 처음으로 하늘을 열고 태백산(백두산) 신단수 아래에 내려와 나라를 세워 홍익인간(弘益人間)·이화세계(理化世界)의 대업을 시작한 달이 시월이다.

만물이 영그는 시월은 풍요롭고 윤택해진다. 곡식과 과실들만 영그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도 영그는지, 모두가 넉넉해져서 한 마음 한뜻의 기치아래 각종 모임이나 행사를 가진다. 서로 대립 중인 파벌들이 힘을 합쳐 공동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자고 협치와 융합의 슬로건으로 이마를 맞대기 좋은 계절도 시월이다. 가을은 협동의 계절이다.

지인에게 물어봤다. 시월의 상징 중 가장 먼저 떠오르게 무엇인가? 하늘이란다. 그럴 것 같다. 시월 하늘은 눈이나 우유 빛깔 같이 맑고 선명하고 매우 높고 넓다. 오방색의 기원이 되는 오행에 따르면 오방정색이라 하여 황(黃), 청(靑), 백(白), 적(赤), 흑(黑)의 5가지 색을 말하는데 오색을 방위 구분하면 중앙과 사방을 기본으로 삼아 황(黃)은 중앙, 청(靑)은 동, 백(白)은 서, 적(赤)은 남, 흑(黑)은 북을 뜻한다. 여기에서 백색은 서쪽을 상징하며 계절로는 가을을 뜻한다고 했다. 조상들은 흰색을 말할 때 아주 희다는 뜻으로 순백(純白), 수백(粹白), 백정(白靜), 정백(精白)이라 하거나 때로는 선명하게 희다고 해서 선백(鮮白)이라고 표현했다. 눈빛을 설백(雪白), 젖빛을 유백(乳白), 달걀빛을 난백(卵白), 잿빛을 회백(灰白), 누르스름한 빛을 황백(黃白), 푸르스름한 빛을 청백(淸白)이라 부르는 등 백색과 관련한 용어가 다양하다. 시월의 하늘은 청백에 해당할 것이다.

옛 중국 명나라에 동월이라는 사신이 우리나라 풍토를 조선부(朝鮮賦)라는 책에 수록 하면서 ‘우리 민족은 흰옷을 좋아한다’고 기록했다. 백(白)은 결백, 진실, 순결, 밝음 등을 뜻한다. 흰 옷을 즐겨 입는 것은 삶 자체가 진실하고 결백함에 근본을 두고 있다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백추(白秋)라 해서 가을을 하얀 계절이라고도 한다. 흰색의 강한 이미지는 여백이다. 가을은 여백의 결실과 성숙의 미를 가지는 계절이기도 하다. 가을 하면 살살이 꽃(코스모스)과 함께 가장 먼저 떠오르는 들국화, 구절초, 쑥부쟁이, 개미취 등의 꽃들은 가을이라는 여백을 배경으로 사람들의 시야를 시원하게 하며 정서적으로 순수한 마음을 가지게 한다.

가을은 ‘이별의 계절’이다. 문학적 성분의 가을은 시인묵객들의 자양분이다. 그리고 그 자양분의 바탕에는 이별의 노래가 많다. ‘이별’이라는 낱말이 풍기는 정서적 의미는 한국 사람에게 있어서 각별한데 그것을 정과 한의 관계를 통해 밝혀 본다면, 한국 사람의 정서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정(情)’과 ‘한(恨)’이다. 

‘정’은 한자어에서 비롯된 말로, 단순한 사랑이 아니고 미움과 노여움이 공존하는 사랑이다. 흔히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었다”는 말을 하는데, ‘미운 정’이라는 모순 감정의 표현은 ‘정’이 증오(憎惡)까지도 수용하고 또 초월하는 사랑임을 나타낸다. 이처럼 한국 사람은 사랑과 미움이 공존하는 정에 의해 끈끈한 유대관계를 형성하며 살아가고 있다. 

한용운은 ‘님의 침묵’에서 “이별은 미의 창조입니다”라고 했다. 이별은 무색이다. 가을에 이별의 노래가 유난히도 많은 것은 ‘있는 그대로’의 미운 정 고운 정이 순백한 가을로 동화되는 것이다. 청백의 하늘을 향해 살랑거리며 시월을 뒤로 하는 살살이 꽃무리 자태에서 백추를 엿보며. 그 가을 속으로 걸어가는 ‘순백하고 정정당당한 이별’들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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