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70년대엔 프로레슬링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거리가 한산할 정도로 인기가 폭발했다. 1965년 8월 6일은 일본에서 활약하던 ‘박치기 왕’ 김일이 귀국한 역사적인 날이다. ‘턱수염’ 장영철이 인기를 누리던 한국 프로레슬링계는 일대 지각변동을 겪게 됐다.

김일은 외국 선수 초청 등 모든걸 직접 관장하면서 흥행 규모를 국제적인 수준으로 격상시켰다. 한국 프로레슬링은 장영철이라는 생모 밑을 떠나 김일이라는 새어머니의 보살핌을 받게 됐다. 

1965년 11월 27일 장충체육관. 이날의 메인이벤트는 김일과 미국의 칼 칼슨의 대결이었다. 이 경기에 앞서 세미파이널로 장영철과 일본의 오쿠마가 대결했다. 장영철이 오쿠마의 허리꺾기에 걸려들어 신음하자, 갑자기 2~3명의 젊은이들이 링 안으로 뛰어 들어가 장영철을 구해냈다. 졸지에 경기장은 난장판이 됐다.

오쿠마 측은 난입한 청년들을 폭행 혐의로 고소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후배와 제자들이 다칠지 모른다는 생각에 장영철은 폭탄선언을 했다. “오쿠마 측이 약속을 어겼다. 프로레슬링은 쇼다.”

김일의 인기가 장영철을 능가함에 따라 일본 측은 김일의 최강 이미지를 더욱 높이기 위해 장영철에게 게임에 지도록 요구했다. 장영철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날 경기는 장영철이 이기는 것으로 각본이 짜여졌는데, 오쿠마 측은 장영철을 희생시키기 위해 각본에도 없는 허리꺾기를 진짜로 해 쇼를 뒤집어버린 것이다. 이미 이같은 낌새를 눈치채고 있던 장영철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링 주변에 후배와 제자 레슬러들을 대기시켜 놓았던 것이다.

“프로레슬링은 쇼”라는 장영철의 폭로 이후 한국 프로레슬링의 인기는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하지만 1972년 ‘10월 유신’ 이후 김일 후원회와 김일 체육관이 건립되는 등 다시 붐을 맞게 된다.

대한체육회는 ‘2018년 대한민국 스포츠영웅’으로 2006년 세상을 떠난 ‘박치기왕 김일’과 1980년대 양궁 스타 김진호를 선정했다. 어렵고 힘든 시절 국민에게 큰 감동과 즐거움을 선사한 공로를 인정했다. 그래도 그시절의 쇼는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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