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은 첫눈이라 연습 삼아 쬐끔 온다’
울산지척 영남알프스에 많이 내린 눈
‘긴 터널 빠져나오면 눈의 고장이었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 관객 왜 줄을 잇나
2019년에도 허리띠 졸라매야 할듯
저마다 위로와 격려가 아쉬운 연말

 

김병길 주필

울산시 지척의 영남알프스 산간지역에는 눈이 많이 내렸다. 겨울산은 새 한마리 날지 않는다. 바람만 바위며 나무를 붙들고 차갑고 높은 음악 소리를 낸다. 꽃피어 찬란하던 골짜기의 봄, 그리고 여름, 남은 잎들이 가을 낙엽이 되기까지 섭섭하기도 했을 시간이 모두 갔다. 그저 적막하기만 한 ‘겨울산’에 가면 귀가 시렵다.

‘첫눈은 첫눈이라 연습 삼아 쬐끔 온다/ 낙엽도 다 지기 전 연습삼아 쬐끔 온다.’(신현득의 ‘첫눈’ 중). 영남알프스 산간엔 ‘쬐끔’ 온게 아니라 제법 많이 내렸다.

‘산이 울면 눈이 내린다’는 속담이 있다. 시베리아 고기압이 한반도로 세력을 확장하면 우리나라는 추위와 함께 강한 바람이 찾아온다. 이 바람이 서해의 습기를 머금고 차령산맥이나 소백산맥을 넘을 때 ‘우우웅’하는 울음 소리를 낸다. 산이 울기 시작한 후 5~6시간 후에는 본격적으로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충청, 호남 서해안 지역에 내리는 지형성 눈으로 폭설로 바뀔 때도 있다.

울산을 비롯한 동해 남부지역엔 ‘겨울 남동풍이 불 때는 먼길을 삼가라’는 속담이 전해온다. 동쪽으로 빠져나간 고기압의 바람이 남동풍으로 들어올 때는 동해 남부지방에 폭설이 내린다.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옛날에 먼 길을 가다가 큰 눈을 만나면 낭패를 볼 수 있었다.
시인 정호승은 “아직도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하는 사람들 때문에 첫눈은 내린다”라고 했고(‘첫눈 오는 날 만나자’), “첫눈이 가장 먼저 내리는 곳은/ 나를 첫사랑이라고 말하던 너의 입술 위”라고 노래했다(‘첫눈이 가장 먼저 내리는 곳’).

그래서 첫눈 오는 날 전화 통화량이 평소보다 두세 배 폭주한다. 수많은 청춘의 사랑이 이뤄지고 부서지던 곳. 그 시절 공중전화의 추억은 여전하다. 영화에서 선연히 남은 공중전화 이미지는 ‘영웅본색2’(1987·왕자웨이 감독)의 엔딩 장면이다. 갱단의 총을 맞은 형사 장궈룽(張國榮)이 피를 흘리며 공중전화 부스에서 아내에게 전화를 건다. 딸 출산 소식을 들으며 아기 이름을 지어주고 숨을 거둔다. 초연결사회가 된 지금 공중전화 그 아날로그 쇳덩어리가 정답다.

대한민국에서 두번째 겨울을 맞이한 평양남자 태영호 전 런던 공사는 “서울에 폭설이 내렸으나 눈 치우는 사람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문득 눈 오는 날 평양 거리가 떠올랐다. 북에선 눈이 예고없이 많이 왔다고 시내가 마비되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다. 일기 예보가 정확해서가 아니다. 평양시는 청소 담당 구역에 따라 시내를 바둑판처럼 쪼개고 각 구역을 인민반(한국에서 통단위와 비슷)으로 나눴다. 눈 오는 날이면 온 동네가 오전 6시에 일어나 집 주변과 길거리를 말끔히 치워야 한다.

평양 주민들의 이런 문화에 가장 감동한 사람이 평양주재 스웨덴 대사였다. 눈이 많이 오는 나라에서 온 스웨덴 대사는 눈만 오면 전체 평양시민이 새벽부터 일어나 말끔히 눈을 치우는 걸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

그 비결을 묻기에 태공사는 “조선민족은 원래부터 눈이 쌓이는 것을 보면 참지 못하는 부지런한 민족”이라고 설명했다. 그랬더니 스웨덴 대사는 “그렇게 부지런한데 왜 못사느냐”고 되물었다. “미국 놈들 때문에 국방비에 너무 많은 것을 지출하다보니 못산다”고 대답하니 그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떡였다고 했다. 어이가 없어 그랬는지 알 수 없다.

세 밑 극장가에 영화 ‘국가부도의 날’ 관객이 줄을 서고 있다. 1997년 외환위기에 이르게 된 과정을 긴박하게 묘사해 당시 어두운 터널을 직접 경험한 세대의 기억을 끌어내며 공감을 얻고 있다.

“대한민국의 국가부도가 임박했다고 하는데 사실입니까?” “사실이 아닙니다.” 기자와 정부 관계자 사이에 오가는 대화다. 영화 속에서 정부는 숨기기에 급급한다. 영화 대사지만 21년 전 일어난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했다는 점에서 허구라고만 볼 수 없다. 정부의 부인과는 반대로 국가부도는 일어났다.

국가부도까지 남은 시간은 일주일. 영화는 긴박했던 순간을 그려낸다. 낯익은 기업의 이름들 위에 빨간 줄이 그어진다. 도산 기업이 속출했다. 이 시대의 상당수에 그 상처와 아픔이 가시지 않았다. 영화엔 사실과 허구가 마구 뒤섞여 있다.

영화에는 세 부류의 인간 군상이 등장한다. 정부 관계자, 기업인, 일반 소시민. 우선 정치권의 이권 다툼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소시민들이 먼저 위로를 받아야 한다. 영화는 IMF 사태가 난지 20년 후를 살짝 보여주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그때의 어리석음은 반복되고 있다. 영화는 이달들어 며칠전 영국 케임브리지대 장하준 경제학 교수의 경고와 겹쳐진다. 장교수는 런던특파원들과의 인터뷰에서 “한국 경제 상황은 국가 비상 사태”라며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받아들이는 게 해결의 첫걸음”이라과 했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올해 연간 베스트셀러 10위권 중 절반 이상인 6권이 따뜻한 말과 위로를 건네는 에세이였다. 출판 시장에서 위로라는 키워드는 경제가 어려울 때 특히 주목받는다. 1997년 외환위기 직후 이어진 구조조정과 대량 실직사태 때는 ‘가시고기’ ‘아버지’처럼 가족애를 강조한 소설과 희망과 용기를 담는 책들이 사랑을 받았다. 크건 작건 저마다의 위로와 격려가 아쉬운 연말이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면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췄다.”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소설 ‘설국(雪國)’의 첫문장이다. 주인공은 기차를 타고 눈의 고장으로 간다. 시간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면 눈의 나라다. 2018년 ‘어두운 터널’을 빠져나가면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시간이 다시 올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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