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배호 화백.

중역회의에서 한 임원이 무심코 ‘눈에 띄는 이름’을 중얼거릴 때 다들 귀가 번쩍 뜨였다. 1990년대 초반 한국 제빵업의 선두주자였던 삼립식품(현 SPC삼립)이 크림빵, 호빵과 함께 지금도 ‘전설의 히트 상품’으로 꼽는 ‘누네띠네’는 그렇게 탄생했다. 소비자들의 눈길을 확 사로잡을 수 있어야 했다. ‘누네띠네’는 상업적 성공과 함께 우리말 흐름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문법이라는 고정관념의 틀을 깨자 발상의 전환이 가능해졌고 ‘새로움’을 담을 수 있었다.

이후 소리 나는 대로 적는 방식이 각종 작명에서 유행처럼 번졌다. 1993년 대전엑스포 때 나온 ‘도우미’를 비롯해, 푸르지오, 모메존 같은 상품명이 그런 효과를 기대하고 만들어졌다. 이 가운데 ‘도우미’는 <표준국어대사전>(1999년)에 올라 한글 단어가 됐다.

차원은 다르지만 60여 년 전 이승만 대통령도 이런 식의 표기법을 시도 했다. 그는 6•25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았던 1954년 3월 기존 맞춤법(형태주의)을 뒤엎는 혁명적 담화가 나왔다. 이후 7월에 “구한말 성경맞춤법으로 돌아가라”는 ‘한글 간소화안’을 발표했다. 한글맞춤법 통일안(1933년) 부터 이어져 온 형태주의를 버리고 소리 나는 대로 적는다(표음주의)는 게 핵심이었다.

가령 ‘꽃이 예쁘다’는 ‘꼬치 예쁘다’로, ‘옳다’는 ‘올타’라고 쓰자는 것이니 지금으로선 상상도 못할 변화였다. 전국에서 탄원과 청원이 잇따르고 국민적 저항이 일었다. 결국 1955년 9월 ‘없었던 일로 하겠다’는 담화로 가라앉았다. 이른바 한글파동의 전말이다.

1월9일 개봉하는 영화 ‘말모이’(주시경 선생의 우리말 사전 원고)는 언어로 일제에 맞서는 이야기다. 1942년 일제가 조선어학회 회원과 관련자들을 체포하고 투옥했던 사건을 배경으로 허구의 인물들이 벌이는 ‘우리말 지키기’ 투쟁인데도 거북함이 없다.

이승만 대통령의 시도는 반세기 뒤 인터넷 시대에 일부나마 빛(?)을 봤으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가령 ‘싫어’를 ‘시러’로, ‘어떻게’를 ‘어떠케’로 쓰는 게 그렇다. 국어 파괴 논란도 있지만 특정 공간에서의 자연발생적 인터넷 ‘말모이’를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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