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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이야기] 말 줄이고 침묵하며 기다리는 것 ‘한해의 다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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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감우 시인
  • 승인 2019.01.08 22:30
  • 댓글 0

 ‘첫’이라는 말이 품는 거대한 신세계
 새해 시작 사회 첫발 준비하는 딸에
 어설픈 격려보단 ‘자연의 소리’ 건네

 

김감우 시인


새해 첫 주말을 맞아 신명 바닷가에서 1박을 했다. 필자의 가족에게 연례행사로 자리 잡은 여행이다.
나흘 전에 해돋이 인파로 붐볐을 해변은 참으로 고요했다. 고요하다는 것은 자연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날이 저물자 바다는 소리로 다가왔다. 밤이 깊어질수록 창을 넘어오는 파도소리가 명료해지고 그 소리에서 바람을 함께 만나는 일이 즐거웠다. 그날의 바람은 결이 거칠지 않고 단정했다.

소한의 절기임에도 바다는 마치 잘 다독여진 김장독처럼 자분자분했다. 필자는 딸아이와 늘 하던 대로 줄 공책을 하나씩 펴 둔 채 마주보고 앉아 바다를 즐겼다. 우리는 거기 아무것도 쓰지 않았지만 훗날 언젠가 밤바다의 말을 읽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첫’이라는 말은 신성하다. 그 말 속에 거대한 새 세계가 태동하는 소리를 품고 있기 때문이리라.

“처음도 없고 끝도 없는/이 永劫의 둘레를/뉘라서 짐짓 한 토막 짤라/ 새해 첫날이라 이름 지었던가” 조지훈의 시 「새 아침에」의 한 구절이다. 이 시처럼 어쩌면 계절의 한 복판에 서 있는 우리들 사이로 시간이 흘러갈 뿐일 것이다. 아니 무궁한 시간 속에서 우리는 그저 찰나를 살다갈 뿐이겠으나 새해 첫날에 뜨는 해는 장엄하고 감격스럽다. 그것은 새롭다는 메시지의 힘으로 다시 생의 한파를 헤쳐 가려는 희망일 것이다.

첫차, 첫입, 첫물, 첫눈, 첫술, 첫맛, 첫닭, 첫 새벽(꼭두새벽), 첫 봄(이른 봄), 첫 걸음 등, 첫이 붙은 말은 정갈하고 설렌다. 물론 동시에 낯선 세상을 대면해야하는 두렵고 떨리는 말이기도 하다. 그중 필자는 첫 걸음을 좋아한다.
새해의 첫 걸음을 딸아이와 나란히 시작했다. 대학 4학년인 딸은 고민이 많아 보였다. 작년 연말에 펑펑 울면서 엄마 품으로 안겨왔지만 객지생활의 힘든 과정쯤이라고만 여겼다.
“등록금 걱정 안하는 게 어디야. 우리 때는 얼마나 힘들게 공부했는데”를 근저에 둔 꼰대 엄마였는지 모른다. 좁은 취업의 문 앞에 선 딸에게 세상은 만만치 않은 한파덩어리라서 온기가 절실했던 것인가? 어릴 때부터 혼자서 뭐든 잘 견뎌오던 든든한 아이의 갑작스런 눈물은 며칠 동안 엄마인 필자를 많이 아프게 했다.

지나온 시간을 찬찬히 돌아보며 함께 텅 빈 해안을 걸었다. 필자 역시 이런 엄마의 역할이 처음인지라 별달리 답은 해주지 못했다. 어설픈 ‘좋은 말’보다는 자연의 소리를 들려주는 것이 지친 아이에게 더 위안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요즘은 ‘TMI( too much information)’의 시대라고 한다. 눈을 뜨면 쏟아져 들어오는 메시지와 정보들이 어지럽게 난무하는 현실을 달려가던 딸아이 역시 지쳐 있을 것이었다.

필자는 가끔 언어 이전의 세상을 여행하는 꿈을 꾼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의 딸아이에게도 그런 선물을 주고 싶다. 언어 이전의 세상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바윗돌의 오랜 침묵이나 꽃이 피고 지는 소리나 별의 운행에 귀를 기울이며 자연과 가깝게 교류하는 일일 것이다. “동물의 말하기 능력은 보잘 것 없다. 하지만 그 보잘 것 없는 능력은 유용하고 진실하다. 커다란 거짓보다 작고 확실한 진실이 더 낫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말이라고 한다. 돌아보면 필자 역시 지난 해 얼마나 많은 말,말,말을 뱉은 것일까. 말은 할수록 본질에서 멀어지는 경우가 더 많다. 상대와의 관계를 회복시키기는커녕 더욱 엉겨서 나중에는 그 일의 본질은 사라지고 날선 말의 서슬만 상처로 남는 경우도 많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욱 그렇다.

훨씬 더 실체에 가까운 말들은 침묵 속에 있다. 침묵이 아니면 전달할 수 없는 어떤 진실이 있는 것이다. 필자는 가까운 사람에게 말을 줄이고 침묵하며 기다리는 것을 한해의 다짐으로 삼았다. 물론 이것은 해야 할 말에 입을 다물어버리는 무책임과는 다르다.
필자는 지난해 첫 시집을 내면서 ‘첫’이란 말의 힘을 실감했다. 주변 분들의 축하와 격려가 첫이라는 말에 실려 오가면서 그 첫이라는 말이 품은 넉넉한 관용의 마음을 빚진 셈이다. 빚은 방향성이다. 따뜻이 침묵하며 기다리는 것으로 하나하나 갚아나갈 한 해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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