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기운 받아 돋아난 이랑의 새싹
향긋한 내음 품은 냉이 한가득 캐
찌개 끓여내니 식탁에도 봄이 와

 

이동우
한국언론진흥재단·작가

지난해 미처 뽑지 못한 고춧대를 뽑았다. 작업은 수월했다. 봄기운을 받아 땅은 이미 푹신하게 녹아 있었고 고춧대는 쑥쑥 뽑혔다. 밭고랑에 씌워 놓은 비닐도 벗겨냈다. 겨우내 비닐이 감싸고 있던 밭고랑의 흙은 부드러웠다. 한때는 얼어 있던 땅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다. 밭고랑을 걸었다. 발이 푹푹 들어갈 정도로 부드럽다. 부드러운 흙의 감촉이 온 몸으로 전해진다. 봄을 온 몸으로 맞는 느낌이었다.

이랑엔 파릇파릇 돋아난 새싹들이 보인다. 냉이도 수줍게 모습을 드러냈다. 고춧대의 가지를 꺾어 호미 대용으로 사용했다. 냉이를 캐서 손에 들고 향기를 맡아 보았다. 봄 내음이 향긋하다. 겨울을 가로질러 냉이가 봄에게로 왔다. 봄 햇살에 이끌려 나온 이웃집 아주머니가 밭둑에 앉아 있다가 말을 건다.
“뭐 심으려고 그러니?”
“참깨 심으려고 해요. 들깨도 심고.”

아주머니는 밭 언저리 한, 두 고랑만 당신에게 달라고 한다. 파도 심고, 상추도 심고, 이것저것 심어 먹겠노라는 말도 덧붙인다. “그러세요. 그쪽에 알아서 심으세요.” 아주머니가 앉아 있는 쪽을 가리키며 알아서 적당히 밭을 가꾸라고 했다. 몇 십 년을 한 동네에서 살아온 아주머니에게 그 정도는 내어줄 수 있다.
“냉이 어디 많은지 아세요?” 된장찌개를 끓여 먹기에 모자람이 없을 정도로 냉이를 캤지만 조금 더 캘 수 있다면 도시로 가져가 아내에게 봄을 선물하고 이웃들에게도 나눠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저쪽에 한 번 가봐” 아주머니는 손끝으로 개울 건너 야트막한 산 밑의 들판을 가리켰다. 점심을 먹고 가보기로 했다.
점심을 먹고 마당으로 나와 봄바람을 맞고 있는데 집 뒤편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집과 바로 붙어 있는 배 과수원 쪽이다.
“이쪽으로 와라.” 호미와 바구니를 들고 과수원으로 갔다. 아주머니의 자루에는 이미 냉이가 한 가득이다.
“냉이 많아요?” “파릇파릇 한 데로 가 봐.”

심은 지 몇 년 안 돼 아직 여린 배나무 주변에 새싹들이 파릇하게 올라왔다. 파릇한 새싹들 가운데 냉이가 적잖이 보인다. 사람이 일부러 심어 놓은 듯 무리를 지어 있기도 했다. 냉이를 찾으러 여기저기 돌아다닐 필요 없이 한곳에 털썩 주저앉아 냉이를 캤다. 가져간 바구니에 금방 냉이가 가득하다. 봄 햇살이 머리와 어깨위에 내려앉았다. 봄이 어루만져주는 느낌은 부드럽고 따사로웠다. 마음이 한없이 평온해지고 행복했다. 봄이 주는 행복을 나누고 싶었다. 근처에 사는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여기 냉이 엄청 많아. 냉이 캐러 와.” 과수원 주인은 가지치기를 하고 있었다. 배 과수원을 먼저 시작한 동네 형이 가지치기를 도와주고 있었다.
“가지를 두 개만 남기고 잘라 내면 돼. 나중에 이 두 가지를 이렇게 옆으로 뻗게 해서 묶어 줘야 하거든.”

작년 가뭄에 여린 배나무가 말라 죽어 다시 이식을 했다는 과수원 주인은 이 십 년 경력의 선배의 설명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수원 주인의 아내도 어느 결에 나왔는지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냉이를 캐고 있다.
삼십분 정도 지나서 친구가 도착했다. 친구는 아내와 함께 왔다. 친구와 친구의 아내는 한 동네에서 같이 자란 선후배 사이다.
“맥주 한 잔 마시고 해.”

배 밭에 둘러 앉아 친구와 친구의 아내와 셋이 맥주를 마셨다. 봄에 취한 것인지 알코올에 취한 것인지 모를 기분 좋은 취기가 몰려왔다.
한 시간 정도 더 냉이를 캐고 집으로 돌아왔다. 물에 냉이를 씻었다. 뿌리에 붙었던 흙이 풀어지며 물이 금방 붉어졌다. 흐르는 물에 몇 번 더 씻어낸 다음 냉이를 물에 담가 두었다.
오랜만에 몸을 움직였기 때문일까. 졸음이 살포시 밀려왔다. 건넌방에 들어가 이불을 펴고 잠을 잤다. 나른한 봄의 오후가 그렇게 지나갔다.

한 숨 자고 일어났더니 몸이 개운하다. 쌀을 씻어 밥을 안치고 냉이를 마저 씻었다. 묵은 잎을 떼어내고, 냉이와 함께 딸려온 검불도 떼어냈다. 몇 번이고 다시 씻어내고 내서야 냉이는 깨끗하고 뽀얀 뿌리를 드러냈다. 된장을 풀고 봄동과 파를 함께 넣어 찌개를 끓였다. 저녁 식탁엔 봄의 향기가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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