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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 여성들의 아픔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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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섬미 기자
  • 승인 2019.03.20 15: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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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에 이어 올해까지 세 번의 남북정상회담과 두 번의 북미정상회담이 열렸다. 세계는 화해의 분위기를 타고 더디지만 평화를 위해 한발자국씩 나아가고 있다. 북한을 떠나온 탈북자들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며 믿어지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여전히 분단의 비극과 탈북자들에 대한 편견은 현재진행형이다. 쉽사리 아물지 않을 상처에도 씩씩하게 한국에 정착한 그녀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편집자주>

 

"아버지 찾아 중국 갔다가
팔려왔다는 사실 알게 돼"

 

# 1998년 아버지 찾아 중국으로 떠나
탈북을 하게 된 이유는 중국에 있는 아버지를 만나게 해주겠다는 브로커의 유혹 때문이었다. 아픈 어머니와 여동생을 두고 1998년 12월, 얼어있는 두만강을 건넜다. 이미 브로커가 군인에게 뇌물을 줬기 때문에 안전하게 중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연변까지만 도착하면 아버지를 만나게 해주겠다던 브로커는 계속해서 말을 바꿨다. 의심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따라 화룡, 연길, 설안까지 이동했다. 하지만 그곳에서 날벼락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그들에게 팔려왔다는 거다. 

# 17살 연상 남자에게 팔려가듯 시집
돈을 주고 나를 사왔다는 조선족 부부는 일을 해서 수당을 바치든지 시집을 가야한다고 했다. 결국 장춘이라는 산골에 17살 차이가 나는 사람에게 팔려가듯 시집을 가야했다. 원치 않는 결혼생활이었지만 아들이 태어났다. 유일하게 남은 것은 자식이라 생각한 나는 아이만 보고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계속 어머니와 여동생이 보고 싶어 차비만 가지고 연길로 떠났다. 

# 브로커 8번 바꾼 끝에 만난 엄마 
브로커를 8명이나 바꾼 후에 어머니와 통화를 할 수 있었다. 10년 만이었다. ‘어머니 제가 성희입니다’ 했더니 처음에는 믿지 않으셨다. 딸이 죽은 줄 알고 계셨다고. 이후 브로커에게 돈을 더 주고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쌍안경을 통해 어머니와 마주했다. 어머니의 모습을 보는 순간 가슴이 미어졌다. 얼굴과 온 몸이 빼짝 말라 가죽만 씌어져 있었고 뼈밖에 없었다. 우리는 서로를 제대로 서서 보지도 못한 채 눈물만 흘려야 했다. 얼굴 본 건 그해가 마지막이고 2013년도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 신분 찾아 한국행
  공안들이 신분증 검사를 하면 늘 붙잡혔다. 이모가 뇌물을 줘서 빼낸 것만 다섯 번은 된다. 그래서 내 신분을 찾기 위해 한국행을 선택하게 됐다. 내가 한국을 가면 북한의 다른 가족들한테 피해는 가겠다고 생각했지만 자꾸 공안에 잡히니 안 갈래야 안갈 수가 없었다. 북한에서부터 간호사가 꿈이라 처음 한국에 왔을 때 간호조무사 학원을 다녀 자격증을 취득해 취업도 잘됐다. 하지만 언어와 성격 때문에 사람들과 자꾸 부딪혔다. 우리들은 직설적으로 표현하니까 충돌이 됐다. 그래서 북한사람들 무섭다는 이야기 많이 들었다. 
김일성, 김정일 시대와 김정은 시대를 비교하면 확실히 발전은 있다. 하지만 탈북해온 분들을 만나면 잘사는 사람은 부유하게 살고, 못 사는 사람들은 여전하다고 얘기한다. 앞으로 모든 정상회담이 잘 진행 돼서 경제적으로도 모두가 잘 지낼 수 있었으면 한다.

 

"어머니 부고 듣고도 고향 못가
눈물 흘리며 분단의 비극 통감"

 

# 친구 따라 나선 길이 탈북으로 이어져
  탈북할 때 나이는 22살이었다. 당시 고등학교 친구 부탁을 받고 같이 압록강을 건넜는데 그게 탈북이 될지 전혀 몰랐다. 12월 겨울이라 강이 얼어 있었다. 얼어있는 강 위로 15걸음 정도 걸으니 중국에 도착했다. 그렇게 처음 발을 들여놓았던 곳이 길림성의 한 교회였는데 그곳에 도움을 받아 6년을 살았다. 
  김정은이 정권을 잡으면서부터 탈북자는 삼대를 멸족하라는 지시도 내렸었다. 그 자리에서 보게 된다면 바로 처단해도 된다는 식이었다. 목숨을 내놓고 탈북을 하는 탈북민들도 많다. 탈북도 그냥 단순 탈북, 생계 유지를 위해 중국으로 가는 정도면 훈방조치해서 몇 개월간 사상 교육 받고 보내주기도 한다. 하지만 한국에 가는 경우에는 문제가 달라진다. 물 한모금 안 먹이고 사람 진짜 말려 죽인다. 다행히 나는 운이 좋았는 지 큰 어려움 없이 나올 수 있었다.

# 한국에서 맞은 제2의 인생
대부분 중국에 있는 북한이탈주민들은 언제든 누가 신고를 하면 북송을 당하는 어려움이 많았다. 내가 살아서 북송이 되면 북한에 있는 가족들이 피해를 입게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런 일은 만들지 않기 위해 한국으로 오게 됐다. 처음 친구 따라 압록강을 건너서 중국에서 살 때는 굉장히 후회를 많이 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 입국하고 나서는 북한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을 경험을 하면서 제2의 인생을 살게 됐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좋기만한 것은 아니었다. 똑같은 한민족이고 한 언어를 구사한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한국에 와서 보니까 너무 달랐다. 북한식으로 단어를 얘기하면 ‘중국에서 왔어요? 교포예요?’ 이렇게 물어왔다. 또 대부분 탈북민들이 비판문화에서 살다 보니 대화할 때 직설적이다. 그런 것들이 대인관계에 마이너스가 됐다. 북한식의 강한 어투, 억양 때문에 주변에서 경계 하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빨리 남한말로 교정을 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 분단의 비극, 아픔
가장 힘들었을 때는 초등학교에 강의를 나갈 때 였는데 강의 10분 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전화를 받았다. 같은 하늘 아래 살고 있지만 갈 수 없는 고향 생각에 눈물이 났다. 그 아픔을 참고 마이크를 잡아야 했다. 당시 아이들에게 내 경험을 통해 이것이 바로 분단의 비극이고, 아픔이라는 것을 그대로 전달했다. 
처음 남북정상회담 한다고 했을 때 믿기지 않았다. 남과 북을 반반 경험한 사람으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다. 김정은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고, 조금씩 한발자국 한발자국씩 내딛다 보면 통일로 가는 그런 밑거름이 되지 않을까 싶은 기대가 든다.  

 

"환상과는 달랐던 한국생활
냉대와 차별로 우울증 겪어"

# 엄마 찾아 탈북 강행
중국에서 장사 하던 어머니가 연락을 준다고 해 기다렸다. 17살이 되어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연락이 없자 어머니 찾아 혼자 탈북 하게 됐다. 압록강을 건너 어머니가 알려준 주소로 힘들게 갔는데 어머니가 안계셨다. 남동생이 어머니를 데리고 떠났다고 했다. 갈 곳이 없어진 나는 그 집에서 살게 됐다. 그러던 중 집주인이 여기서 살기 힘드니 영종으로 시집을 가라고 했다. 선택권이 없었다. 알겠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 팔려가는 거였다, 결혼 전 상대방 남자의 이모집에 들려 며칠 지내는데 뜻밖에 그곳으로 어머니가 찾아왔다. 북한에 잡혀 나갔다 들어온 동생이 내 소식을 들었던 거다. 어머니가 하루만 늦어도 만나지 못했다. 

# 일 하기 위해 한국으로
어머니가 계신 곳으로 가서 지내는데 일 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그때 누군가 청도에 가면 한국 식당과 회사가 많아 돈을 벌 수 있다고 했다. 어머니께 말했는데 허락해주지 않아 편지 한 장 써놓고 2,3개월 아르바이트 한 돈을 들고 도망을 갔다. 청도에 도착한 뒤 무작정 한국회사에 이력서를 넣었고 다행히 좋은 한국 사장님을 만나 5년 정도 회사를 다녔다.

# 순탄치만은 않은 한국생활
사귀던 중국 여자친구를 따라 먼저 한국에 온 남동생의 권유로 어머니를 모시고 한국에 오게 됐다. 누구나 한국으로 올 때는 가면 무조건 잘 살 거라는 환상을 가지고 온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한국에서 택시를 탔는데 기사님이 ‘북한에서 살지 왜 왔냐’고 막무가내로 다그쳐 상처를 받았었다. 취직 하고 나서도 차별을 당했다. 식당에서 근무하면 한 달 급여가 120만원이었다. 그런데 월급 줄 때가 되니 주인이 ‘북한사람이라고 90만원 밖에 못준다’고 했다. 그때 충격을 많이 받았다. 중국에서 살 때는 북한 사람이라고 기죽은 적도 없고 회사 다니면서 돈도 잘 벌었는데 왜 한국에 와서 이런 배척을 받아야 하나 싶어 우울증도 왔고 많이 힘들었다.

# ‘진짜 통일 될까?’
남북정상회담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진짜 저러다가 통일되나?’ 싶다가도 김정은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무슨 생각으로 뒤집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 이대로만 나가면 너무 좋겠지만 맨날 이랬다, 저랬다 하니 그게 걱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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