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하게 따져 본 4·19이후의 변화
대통령중심제→내각책임제가 고작
무한 정쟁 속 사회혼란 극치로 달려

 
10개월간 벌어진 데모 무려 2천건
언론 자유 방종에 ‘김일성 만세’까지
5•16쿠데타에 정가서도 ‘올 것이 왔다'

 
4.19 혁명은 권위주의 정치를 타도한 혁명이었으나 제대로 계승되지 못했다. 사진은 대학교수들까지 나선 시위행렬.

김병길 주필
“혁명이라는 게 뭐야? 기껏해야 관청 이름만 바뀔 뿐이잖아.”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소설 <상실의 시대>에서 여 주인공 미도리는 남자 친구에게 말한다. 혁명이란 “모두들 똑같은 책을 읽고 똑같은 말을 지껄이며 감동한 척하고 있는 것 아니냐고?”고. 그러면서 “그저 서민일 뿐인 나는 변변찮은 곳에서 그럭저럭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한다.

지난 4월19일은 4?19혁명 59주년을 맞이한 날이다. 하루 전 4월18일 오후 서울 성북구 고려대에서 고려대생들이 각 학과 깃발을 들고 교문 밖으로 달려 나가고 있었다. 고려대는 4·19혁명의 도화선인 4·18의거를 기념하기 위해 매년 강북구 국립 4·19민주묘지까지 마라톤을 하는 ‘4·18구국 대장정’을 열어왔다.

4·19혁명 59주년을 맞아 혁명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혁명유공자에 대한 서훈이 7년 만에 이뤄져 40명이 한꺼번에 포상을 받았다. 1960년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됐던 3·15 마산의거와 관련된 형사사건부 기록이 2016년 발굴되면서 가능했다.

연세대 국문과 교수로 4.19혁명 당시 시국선언문 기초 위원으로 활동하고 교수단 시위를 주도했던 고 권오돈 선생 등 40명에게 건국훈장이 서훈됐다. 4·19혁명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공적으로 정부 포상을 받은 사람은 총 1121명에 이른다.

4·19혁명의 충격은 이듬해(1961년) 5·16군사 쿠데타와 1980년대 민주화물결, 그리고 2017년 촛불혁명의 파노라마로 이어진다.

4·19혁명의 언저리부터 더듬어 보기로 하자. 1950년부터 1960년까지 대통령과 부통령, 국회의원, 지방의원을 뽑는 전국적 선거가 무려 일곱 차례 치러졌다. 1948년 건국 당시 우리 국민의 절반은 문맹이었다. 문맹률은 1960년까지 10%로 줄었지만 국민의 다수가 자기 책임으로 정치적 선택을 할 수 없는 사회의 수준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당시 우리사회는 시민사회가 아니라 소농(小農)사회였다. 그리고 모든 선거는 부정선거였다. 대부분의 선거는 유권자가 그 자신을 동원하는 동리, 친족, 관권, 정당의 지시를 따르는 선거였다. 그러니 선거 때마다 전국은 대립적 연고와 권위가 일으키는 거대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권위주의 정치는 다수의 유권자가 특정 정치인을 가부장의 권위로 받드는 예외적인 상황에서 성립된다.

세계대전 후에 독립한 여러 후진국의 정치는 일반적으로 권위주의 정치였다. 성급한 민주정치는 오히려 재앙이었다. 이 나라의 70년 역사가 비교적 성공적이었다면 이승만과 박정희 두 사람이 대통령으로 이어진 권위주의 정치에 그 한편의 공로가 돌려져야 함은 다툼의 여지가 없다.

4·19를 맞아 이승만 대통령은 내각제 개헌에 동의한다는 성명과 함께 하야했다. 이후 1년간 집권 민주당이 벌인 내각제 실험은 명백한 실패였다. 5·16 쿠데타 이후 대통령 중심제는 보다 굳건히 복구됐다. (1962년 제5차 개헌). 이후 대통령 직선제는 이 나라 민주정치를 상징하는 제도로 정착했다.

권위주의 정치를 타도한 4·19를 가리켜 통상 ‘혁명’으로 칭하지만 과도한 면이 없지 않다. ‘자유 민주’ 그것은 12년 전의 건국이 추구한 최고의 이념이었다. 냉정하게 따질 때 4·19가 초래한 변화는 정부 형태를 대통령중심제에서 내각책임제로 교체한 것이 고작이었다. 민주당 집권 10개월간 국무위원의 평균 재임기간은 2개월에 불과했다.

정치가 무한 정쟁을 거듭하는 가운데 사회는 크게 방종했다. 그 10개월 간 전국 도처에서 도합 2000건의 데모가 있었다. 드디어 지하에 잠복해 있던 반국가 세력이 고개를 들고 ‘김일성 만세’를 외치기까지 했다. “언론자유의 출발은 김일성 만세를 인정하는데 있는데”라고 노래한 시인도 있었다. 그들은 자유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고 깨춤을 추고 있었다.

그와 같은 위기의 사태는 이전의 권위주의 정치가 어떤 역할을 감당했는지를 반면교사로 일깨웠다. 일단의 군인들이 5·16이라는 또 하나의 정변을 일으켰을 때 사회는 심지어 정치까지도 올 것이 왔다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그때까지의 정치는 조선왕조 시대에 태어나 독립운동에 종사한 늙은 명망가들에 의해 좌우됐다.

그들은 4·19와 5·16이란 연속 정변으로 퇴진했다. 세계 시장은 후진국이 능력과 의지만 있다면 공업화를 이룰 수 있는 희망의 구조로 바뀌고 있었다. 그런 참에 군대식 규율로 단결하고 실용적 행정으로 훈련된 젊은 정치세력이 나라 만들기 역사의 새로운 주역으로 등장했다. 구태로 몰려 쫒겨난 소수 정치인을 제외한 대다수 국민에겐 커다란 행운이었다.

4·19혁명 59주년을 맞아 여야는 한 목소리로 “민주주의를 수호한 4·19정신을 계승하겠다.”고 밝히면서 공방을 벌였다. 서로 상대 당이 민주주의 정신을 훼손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당은 “4·19정신은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부활해 부마항쟁과 5·18광주민주화운동, 6월 민주항쟁, 촛불혁명으로 이어져 대한민국의 나아갈 길을 밝히는 횃불이 됐다”고 평가했다.
야당 대변인은 “‘민주’라는 법치가 훼손되고 일부 세력이 국민이 부여하지도 않은 권력을 휘두르며 사회 전반을 호령하고 있다”며 여권을 향해 날을 세웠다. 기념식에서는 일제히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4·19정신 계승을 다짐하자는 한 목소리였다.

“수십 년 적폐를 해소하고 낡은 체제를 넘어 새로운 시대로 가야한다”는 문재인 정부는 기존의 갈등 요인을 수렴하는 노력을 해야 갈등을 줄일 수 있다. 정치가 무한 정쟁을 거듭하는 가운데 사회는 크게 방종해졌다.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일부 특정 세력의 안하무인식 발호가 4·19 직후의 혼란을 고스란히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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