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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기획 울산옛터비에 담긴 기억들
“울산 발전위해 정든 고향 내줬지만 실향민 돼 아쉬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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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옛터비에 담긴 기억들 – 공단 이주민이야기
(5) 김만식(1944년생)씨의 남구 용잠마을

     옛 대현면 속한 마을 논밭 많고, 해산물 풍족했지만 궁핍한 생활
     제주도서 해녀 데리고와 `우뭇가사리' 채취, 미역 전복 등도 많아
     SK공장 들어서면서 이웃들 부곡 야음 수암 등지로 뿔뿔이 헤어져
     공기 좋고, 인심 좋았던 바닷가 마을… 옛터비 보며 아쉬움 달래

울산 남구 용연동 옛 용잠마을(SK가스)에 세워진 ‘옛터비'와 옛 용잠초등학교 설립자 이종만선생 공덕비.


어릴 때는 울산시가 아니고, 대현면 용잠리였어요. 면 소재지는 장생포였고. 용잠엔 어떤 직장을 다닐만한 그런 것도 없고, 반 정도는 농사를 지어 생계를 유지하고, 또 반 정도는 어업에 종사했지.

용잠에 논밭이 제법 많았어. 장생포 쪽에서 보면 사료공장이 있는데 그 뒤쪽이 다 용잠이거든요. 논밭이 한 50%, 50% 정도. 마늘, 고구마, 콩 같은 작물을 심고, 논은 이모작을 했어요. 겨울에는 보리도 심고, 보리 베고 나면 모도 심고. 그래도 늘 식량이 모자랐지. 그때는 수확이 많지 않아 자급자족이 잘 안 돼요. 용잠 사람들은 장생포에서 고래 생 거를 사와 집에서 삶아 시장에 가서 팔기도 하고. 우리 어머니도 제가 알기로 한 15년, 20년 가까이 고래 팔러 다녔어요. 내가 초등학교 다니고 중학교 다니고 할 때 하셨어요.
 
# 형님이 제주도 해녀 데리고 와 사업

형님은 고등학교 졸업하고 집안일을 도왔어요. 누님이 계실 때는 형님이 해녀 사업을 했었어요. 겨울철 되면 제주도에 직접 가요. 거기서 한 15명 그 정도의 해녀를 선금을 주고 모집해 계약을 하는 거지. 제주도도 역시 그때는 어렵고 하니까 육지에 나와 돈을 벌어 그거 갖고 자기들도 결혼도 하고 했어요. 해녀들은 여객선 타고 부산으로 왔어요. 마을에 오기 전에 형은 계약한 사람들 15명이 1년 동안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는 방책을 다 마련해 놓는 거지. 한 방에 3명 내지 4명씩 자취 생활할 수 있게끔 방을 구해 놓고, 또 모자라는 양식을 구할 수 있게끔 항상 그런 식으로 대비를 해놓는 거지.
 
김만식씨.

형님이 그네들을 데리고 영업을 했어요. 멍게를 잡는다, 천초를 한다고 하면 그 사람들을 싣고 바다로 나가야 될 거 아니야. 그러면 형이 배를 딱 준비해놨다가 그 사람들 태워가 바다에 나가서 영업을 하지. 영업을 해온 걸 말릴 수 있는 자리 같은 데를 마련해서 그래 말려서 팔게 되면 1년 계산을 하는 거지. 해녀들이 제주도로 돌아갈 때쯤 되면, 3은 형이 먹고 7은 자기들이 가져가고 이런 식으로. 형이 용잠에 있을 때 그런 해녀 사업을 내가 알기로는 한 10여 년 했어요. 남화만 해녀 사업하는 사람들이 없었고 나머지 용잠, 용연, 황암, 성외 쭉 가면서 해안 부락 사람들은 다 하지.

해녀들이 많으니까 해안 부락 어촌계 조합이 형성되어 있는 거예요. 장생포 어업조합이 총 지휘를 하고, 각 동네마다도 해녀업을 하는 사람들이 전부 다 법규가 있어가 언제에서 어디까지는 천초를 한다, 그리고 언제 어디까지는 멍게나 전복을 채취 한다. 해산물 잡는 거는 시기가 있어가지고 그 시기에 딱딱 맞춰갖고 작업을 하지. 주업이 우뭇가사리였어요. 왜냐하면 그때에는 우뭇가사리가 양도 제일 많았을 뿐만 아니라 돈이 제일 되니까. 우뭇가사리 하는 그 기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기는 바닷가 말로 ‘헛물외’라고 하지. 그 기간에 멍게를 한다든지 해삼을 한다든지, 전복도 따고, 그때 그때 많이 나는 걸 채취하는 거지.
 
지금은 사진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옛 용잠마을.

# 동네 한가운데엔 당수나무 있는 제당

제당이 동네 한중간에 있었는데 당수 나무는 오래된 소나무 였어요. 제당은 기와로 보기 좋게 되어 있고, 담장이 딱 쳐져 있었지. 문을 잠가 놔도 동네 사람들이 필요하면 들어가고. 어촌 마을이기 때문에 한 번씩 어촌제를 지냈다고. 용왕제 같은 거 지내기도 하는데, 그걸 크게 지냈어요. 보통 한 3박 4일 정도 굿을 하고, 다른 데서 무당이 오죠. 그걸 하게 되면 제를 모시는 사람, 제당을 모시는 사람, 이런 식으로 딱딱 역할을 정하면 그 사람한테 미역을 딸 수 있는 권한을 줘요. 미역돌이 있거든. 제를 모시는 사람에게 미역 돌 하나를 떼어 줘요. 해마다 큰 굿을 하는 게 아니고, 한 3년이나 걸러서 지내지.

SK 저 자리가 옛날에 우리 아주 어릴 때 코스코라고 미국 석유회사가 있었죠. 그 자리에 SK가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확장이 된 거지. 어느 날 갑자기 일단 큰 배가 드나들게 되면서 정치망 어장이나 농사라든지 이런 게 어렵게 됐어요. SK 들어서면서 점차적으로 들어서면서 보상을 받았다는 사람이 생기고 하니까, 나머지 사람들이 전부 다 마음이 뒤숭숭 하고. 돈을 좀 많이 받은 사람들은 많이 들떠지는 거지. 그런데 바깥에 나가서 사업을 하다 보면, 경험도 없고, 돈만 가지고 사업을 하다 보니까 망하고.
 
# SK공장 들어오면서 동네 이주 시작

동네가 1978년 정도 돼서 완전히 없어졌어요. 철거는 점차적으로 이뤄졌는데 보상금이 많은 사람들은 마음이 들뜨고 하니까 빨리 해결해서 빨리 나갔고,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은 좀 늦게 한 2년 정도 더 살다가 나갔지. 갈 데가 없는 사람들, 형편이 좀 안 되는 사람들이 제일 많이 찾는 곳이 부곡동이지.
 
마을제당.

부곡동에 가서 살다가 부곡동도 또 한 번 철거됐다 아닙니까. 두 번 철거된 사람도 있고, 또 바다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서생 쪽으로라든지 바다 근처로 이동하는 사람도 있고, 7~8명씩 어울려서는 구역전 거기 언저리에 땅을 구입해 갖고 집을 지어서 간 사람도 있었어요, 우리 같이 수암으로 간 사람들은 크게 많지 않았어요. 또 여상 뒤로 간 사람들이 몇 가구 되고, 주로 부곡 쪽, 야음 쪽으로 갔지. 야음시장 뒤편에. 그때 당시에는 이주민들이 많이 가는 싼 곳이 부곡 쪽, 그 다음이 야음, 그 다음이 신정동이지. 신정동 쪽으로 온 사람들은 하다못해 보상이라도 중류급 이상으로 받은 사람들이지. 측정은 그때 개인적으로 이뤄진 게 아니고, 시하고 동네 관계자들 사이에서 이뤄진 거지.

당시 용잠이라고 해봐야 발전된 곳이, 특이한 곳이 없었거든요. 논은 얼마, 밭은 얼마, 산은 얼마, 이런 식으로 이뤄진 거지. 우선 돈이 들어오니까 다 좋아했어. 40년 전이니까 사람들이 다 순진하고, 지금 사람같이 반항을 하거나 이런 성격들이 아니었거든요. 순응할 줄 아는 그런 사람들, 온순한 사람들이지. 정도 많고.
# 발전 위해 이주…아쉽지만 후회안해

용잠초등학교가 1939년도에 개교를 했다 아닙니까? 용잠국민학교를 건립하신 분이 이종만인데, 이종만공덕기념비가 용잠국민학교로 올라가는 앞쪽에 세워져 있었거든. 공덕비를 77년 1월 17일에 해체를 했고 장생포초등학교로 임시로 옮겨놨다가 2002년도에 10월 현지에 이전했지.

향우회가 만들어진 게 27~28년 정도 되었죠. 저는 처음부터 참여했어요. 내가 5대 회장을 했지. 한 4~5년 정도 했어요. 옛터비 제막식 하기 몇 년 전 앞에 용잠향우회를 했다고. 옛터비는 2003년에 제막을 했으니까, 2000년도 정도에 향우회가 시작됐을란가 모르겠네. 옛터비를 세우려고 하니까 땅이 있어야 될 거 아닙니까. 누가 땅을 쉽게 내줍니까? 옛터비를 세운 자리가 SK 가스 공장이 있었던 자리거든요. 가스 공장에 터를 좀 빌려 달라고 했더니만 자기 공장에서 땅이 필요로 할 때 옮겨가게끔 서약서를 쓰라고 해요. 그렇게 터를 빌려 옛터비를 세웠지. 용잠 사람들이 또래끼리 계중이 있거든. 계중에서 돈을 내갖고 찬조를 했어. 그래도 가끔 망향비 보며 옛 생각하고, 아쉬움도 달래고 있어요.

그때는 우리가 비켜줘야 할 땅이기 때문에, 섭섭하기는 했지만 울산의 발전을 위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생각했어요. 어떻게 할래야 할 수 없는 일이었고. 미래 후손들을 위해서는 조금 아쉬워도 어쩔 수 없지 뭐.

그래도 고향을 잃은 실향민이 되었으니까 섭섭하고 아쉽지. 공기 좋고, 바닷가도 괜찮고, 인심 좋고 이런 곳인데 그걸 잃었으니까.

정리=고은정 기자 kowriter1@iusm.co.kr
자료제공=울산발전연구원 울산학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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