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옛터비에 담긴 기억들 – 공단 이주민이야기
(6) 설동복(1940년생)씨의  남구 매암동(납도)

5대 째 살았던 과수원 많고, 고기도 많이 잡혔던 바닷가 마을
전쟁통에 학교 미군 주둔… 피난민 몰려와 공부도 제대로 못해
울산공업센터·동양나이론 기공식 열렸던 마을… 88년 이주 끝나
망향비 세우고 ‘납도 향토가’ 직접 지어 부르며 망향 아쉬움 달래

 

현재 (주)효성 울산공장(옛 동양나이론)이 들어선 남구 야음장생포동 옛 납도마을. 이 곳에서 1962년 박정희 국가재건 최고회의 박정희의장이 참석한 가운데 역사적인 울산공업단지 기공식이 열렸다.

울산 남구 매암동 납도리, 거기서 5대째 살았어요. 부모님은 고기는 안 잡았고, 농사만 지었어요. 주변에 배 과수원이 많았어요. 일본 사람들 1915년~20년에 납도에 들어와 과수원을 만들었어요. 그 사람들이 해방 후 일본으로 돌아가자 외지 사람들이 과수원을 차지했지. 일본 사람이 납도 사람들에게 권유를 했는데도 그때는 일본 재산을 받아 놓으면 국가가 다 빼앗아 간다고 미리 겁을 먹고 받지를 않았어요.


납도가 바닷가에 한 50~100미터 정도 떨어져 있어요. 그러나 전부 다 바다 일을 하는 사람은 아니고, 한 70호 됐는데 어부 일 하는 거는 세 집인가 네 집 밖에 안됐어요. 당시 바다엔 진짜 고기반이 아니라, 고기가 전부이고 물 쪼금 있는 정도야. 옛날이야기를 들어 보면 할아버지가 양식이 좀 귀하고 하면 거름 소쿠리 있잖아요. 그걸 가지고 바다에 가서 뜨면 물고기가 그냥 반 소쿠리씩 나온대요. 여름에 배에서 고기 잡아 오면 아즈매들이 그걸 중앙시장까지 팔러 갔어요. 차가 없으니까 머리에 이고 막 뛰는 거야. 그래도 시장에 가면 벌써 상하고 하니까 옳은 값을 못 받고 그랬어요.
 
설동복(1940년생)씨.
#전쟁통에 마을학교엔 미군부대가

초등학교 3학년 때 6·25가 터졌어요. 점심시간에 운동장에서 뛰놀고 있으니까 선생님이 방송을 듣고 전쟁 났다고 그렇게 알려주데요. 그때 전쟁인지 뭔지 몰랐는데 조금 있다가 학교를 미군이 차지해 버렸어요. 교실도 다 빼앗기고. 우리는 전부 다 바닷가로 가든지, 안 그러면 저 산으로 다니면서 공부했지. 칠판 메고 가서 거기서 공부하고 그랬어요. 장생포 어구창고, 그물 같은 거 넣어놓고 하는 창고 빌려 공부하고. 3학년이 오전에 가면 4학년은 오후에 이런 식으로 공부를 했어요. 공부가 제대로 될 리가 없지. 비 올 때는 마대 자루 쓰고 가지. 가마니 같은 거지. 근데 그게 물에 젖으면 굉장히 무겁다고. 그거라도 덮어쓰고 오는 사람은 그래도 조금 형편이 나은 사람이고 그거도 못 쓰고 오는 사람은 그냥 노다지 비를 맞고 오는 거라. 미군들이 철수를 한 6학년 때는 겨우 교실에 들어가서 공부를 했어요.

전쟁 때 집에 피난민들이 몰려와 공부를 제대로 못했어요. 우리도 아래채가 있었는데 아래채는 전부 다 피난민들 줘버리고. 큰 방에서 아버지, 엄마와 같이 생활했어요. 형님은 그때 결혼해가지고 옆방에 있었고, 누님은 시집 간지 오래되어 뒷집에 살림 나가 있었고. 내가 초등학교 입학할 때는 우리 반이 한 50명도 채 안 됐다고. 그런데 내가 졸업할 때는 80명이 넘었으니까. 피난민들이 많이 와서 인구가 많이 늘었지.
 

#옆 마을 대일에선 폭약 폭발사고도

옆 마을 대일은 6·25 나고부터 피난민이 들어와 동네가 형성되었어요. 항만사령부라 해가지고, 미군이 폭탄 같은 걸 수송하고 저장하고 하는 그런 부대가 대일에 있으니까 일자리가 있기 때문에 왔죠. 일본이 대일에다 항구시설을 만들다가 해방을 맞았거든. 철도 깔고 항만 공사하는데 인부들도 많이 들어왔으니까.

대일에 미군 폭약부대가 있었는데, 폭발 사고가 났어요. 동네 뒷산에 올라가 직접 봤죠. 큰 불기둥이 솟아오르는데 진짜 한 몇 십 미터 올라가더라고. 그러니 그거 보고 놀라 전부 다 산으로 어디로 도망가고 막 그랬어. 우리도 도망갔지. 그때 집이 기울었으니까. 문틀이 뒤틀려 문이 잘 안 닫힐 정도로. 그때 진짜 대형 사고였지. 동네 사람들이 다 뿔뿔이 흩어졌지. 과수원으로 가는 사람, 이웃 동네로 가는 사람, 뭐 다 그랬지. 불이 솟아오르는 게 내 앞으로 오는 거 같더라고. 무서웠지.
 

매암동 납도마을에서 열린 동양나이론 주식회사 울산공장 기공식 장면.
#우리동네에서 공업센터 기공식 열려

공업센터 기공식을 납도에서 했어요. 납도 바로 건너편이 지금 유공이거든요. 일본 사람들이 정유공장을 지어가지고 굴뚝에 연기를 내다가 해방을 맞았거든요. 그걸 유공으로 재건하면서 납도하고 그 밑의 대일하고 이런 데를 전부 다 산업기지로 책정해가지고 그래 한 거지.

내가 서울 올라가기 전에 납도에서 열린 기공식을 보고 갔지. 흰등산에서 개골섬 앞바다에 불꽃 터지고, 물줄기 올라가고 막 그랬거든요. 그때 대현중학교하고 울여고 학생들인가 좀 동원이 되고, 여기 주민들이 전부 다 동원되고,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직접 내려왔거든. 축사를 하면서 퍼포먼스 그걸 하고.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았어.

옛날 동양나일론이 64년도에 우리 납도 땅을 매입 했어요. 요새 같이 협상도 없었어요. 협상을 하기는 하는데, 공단에는 직접 개인들과 접촉하기보다도 시 협조를 받아서 했어요. 우리 회사가 앞으로 공장을 지을 땅이니까 매입을 하겠다 계획을 갖고 시하고 계약을 하는 거야. 협약을 맺어놓고 하니까, 다른 사람들은 거기에 못 들어오는 거야.

보상 가격, 그때는 요새같이 무슨 평가서가 어딨어? 시에서 보상가격을 일방적으로 정하면 주민들은 그걸 받아들이는 거지. 논하고 밭하고 평당350원, 400원씩. 논도 골짜기에 있는 거는 좀 더 싸고. 같은 동네인데 우리 집 바로 앞으로 끊어가지고 1차 공장부지로 들어가고, 우리 집은 2차로 들어갔지. 앞집은 이미 1964년, 우리 집은 1988년에 들어갔으니까. 공장부지로는 확보를 해놓고 매입을 안 하고 그래 있었는 거지.

이주 뒤에 동네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졌지. 그때는 집단 이주가 없었어요. 내가 여기(야음동) 나와 가지고 한 15년 전까지 항토회를 했어. 향우회하고 향토회하고 두 개를 구분해야 되는데, 향토회라 하는 거는 50년도까지 거기(고향)에서 태어나고 산 사람들을 중심으로 납도에서 뿌리를 내린 사람들, 이걸 향토회라 그래요. 향우회는 늦게 왔든 일찍 왔든 동네에 같이 살았으면 향우회거든요.
 

마을에 들어선 공장 담벼락 인근에 세워져 있는 망향비와 향토가 노래비.
#향토회·향우회 조직해 향수 달래

나는 88년도에 향토회를 조직했어요. 뿔뿔이 흩어져 있다가 경조사 같은 큰일 있으면 사람들이 모이잖아. 그때 한 번씩 모여 얼굴도 보고, 옛날이야기도 좀 하고, 애향심도 가지고 이런 의미에 서 우리가 한번 다시 모임을 갖자 이래가지고 만들었지. 처음에는 남자 여자 합해가지고 한 100여 명 왔지. 마을에 한70호 있었는데, 많이 온 편이지. 다 멀리 안 가고 울산 근교에 있다가 보니까, 서로 끼리끼리 왕래도 하다보니까 모인 거지. 그때 동네 형들하고 같이 했지. 내가 총무를 맡아가지고 운영을 했지. 1년에 한두 번 정도 만나요. 내가 2003년도까지 했는데, 그 뒤에는 우리 밑에 동생들이 맡아서 하지. 근데 100명 오던 사람이 이제 30명도 채 안 와.

향우회가 만들어져서 납도 망향비를 인성산업 담벼락에 세워놨어요. 2016년도에 세웠지. 망향비 제막식 한다고 해서 가보니 향우회가 한 스무 명이 넘더라고. 매월 회비를 내 가지고 돈을 좀 모았는 가봐.

동네 앞에 개구리섬이 있었거든. 멀리서 보면은 개구리가 웅크리고 있는 그런 형상이라. 그래가 개구리섬인데, 물이 많이 들어와도 정강이 정도 밖에 안차지. 만나면 개구리 섬에서 우리가 조개 줍고 화전놀이했던 기억, 그리고 과수원에 일하러 다니던 그런 추억들, 이런 걸 이야기하는 거지요. 회상이지. 그게 애향심이지 뭐. 납도 향토가를 작사∙작곡 해갖고 다 같이 부르면서 옛날 고향의 향수를 그리기도 했어. 지금 망향비 기단 옆에 납도 향토가 노래비도 세워져 있어.

정리 =고은정 기자 kowriter1@iusm.co.kr
자료제공 = 울산발전연구원 울산학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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